【형사판례<조정절차에서 사기죄의 기망행위 판단기준>】《소송사기의 성립에 관한 판례법리가 민사조정절차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지 여부(대법원 2024. 1. 25. 선고 2020도10330 판결)》〔윤경 변호사 더리드(The Lead) 법률사무소〕
1. 판결의 요지 : [조정절차에서 임의이행의사나 능력에 관하여 거짓말하여 민사조정이 성립된 사건]
【판시사항】
소송사기죄 적용의 엄격성 및 소송사기를 유죄로 인정할 수 있는 경우 / 소송당사자들이 조정절차를 통해 원만한 타협점을 찾는 과정에서 다소간의 허위나 과장이 섞인 언행을 한 경우, 이러한 언행이 사기죄에서 말하는 기망행위에 해당하는지 여부(한정 소극) / 조정에 따른 이행의무를 부담하는 피고가 조정성립 이후 청구원인에 관한 주된 조정채무를 제때 이행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원고에게 신의칙상 주의의무를 다하지 아니하였다거나 조정성립과 상당인과관계 있는 손해가 발생하였다고 단정할 수 있는지 여부(소극)
【판결요지】
소송사기는 법원을 속여 자기에게 유리한 판결을 얻음으로써 상대방의 재물 또는 재산상 이익을 취득하는 범죄로서, 이를 쉽사리 유죄로 인정하게 되면 누구든지 자기에게 유리한 주장을 하고 소송을 통하여 권리구제를 받을 수 있는 민사재판제도의 위축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위험성은 당사자 간 합의에 의하여 소송절차를 원만하게 마무리하는 민사조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따라서 피고인이 범행을 인정한 경우 외에는 소송절차나 조정절차에서 행한 주장이 사실과 다름이 객관적으로 명백하고 피고인이 그 주장이 명백히 거짓인 것을 인식하였거나 증거를 조작하려고 하였음이 인정되는 때와 같이 범죄가 성립하는 것이 명백한 경우가 아니면 이를 유죄로 인정하여서는 안 된다.
소송당사자들은 조정절차를 통해 원만한 타협점을 찾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얻기 위하여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다소간의 허위나 과장이 섞인 언행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언행이 일반 거래관행과 신의칙에 비추어 허용될 수 있는 범위 내라면 사기죄에서 말하는 기망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는 없다.
통상의 조정절차에서는 조정채무 불이행에 대한 제재수단뿐만 아니라 소송비용의 처리 문제나 청구취지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잠재적 분쟁에 관한 합의내용도 포함될 수 있고, 소송절차를 단축시켜 집행권원을 신속히 확보하기 위한 목적에서 조정이 성립되는 경우도 있다. 소송당사자가 조정에 합의한 것은 이러한 부수적 사정에 따른 이해득실을 모두 고려한 이성적 판단의 결과로 보아야 하고, 변호사 등 소송대리인이 조정절차에 참여하여 조정이 성립한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조정에 따른 이행의무를 부담하는 피고가 조정성립 이후 청구원인에 관한 주된 조정채무를 제때 이행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원고에게 신의칙상 주의의무를 다하지 아니하였다거나 조정성립과 상당인과관계 있는 손해가 발생하였다고 쉽사리 단정하여서는 아니 된다.
2. 사안의 개요 및 쟁점 [이하 대법원판례해설 제140호, 황성욱 P.620-542]
가. 공소사실의 요지
피고인 A는 전직 은행원으로 D건설 대표이사이자 부산 남구 일대 아파트 건설 사업(이하 ‘이 사건 사업’이라 한다)의 시행사업자이고, 피고인 B는 E개발 대표이사이며, E개발은 D건설로부터 이 사건 사업 시행권한을 양수한 회사로, 피고인 A는 2005. 3. 23. C와 사이에 공동사업약정을 체결하고 2005. 4. 18. C가 소지하던 양도성 예금증서를 담보로 1억 원을 대출받은 다음, 2009. 12. 21. C에게 대여금과 수익금 합계 540,000,000원을 지급하겠다는 내용의 ‘대여금과 수익금(이자)의 지급 확약서’를 작성해 주었다(이하 ‘이 사건 확약서’이라고 한다).
C는 2015. 10. 23. 피고인 A, D건설, E개발, F종합건설을 상대로 약정금 5억 4,000만 원의 지급을 구하는 소(이하 ‘이 사건 민사소송’이라 한다)를 제기하면서 D건설의 토지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과 피고인 A, D건설의 E개발, F종합건설에 대한 용역비 등 채권을 가압류하였다.
피고인들은 C와 분쟁이 계속되면 피고인들이 진행하였던 아파트 시행사업에 차질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아파트 준공예정일인 2019. 5. 이후에야 F종합건설로부터 양도대금을 받아 합의금을 마련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신속히 합의금을 지급하겠다고 C를 기망하여 C와 합의하기로 공모하였다.
피고인 A는 2016. 4.경 C에게 “약정금 4억 5,000만 원을 판결을 통해 받으려면 2심을 거치는 등 몇 년이 걸릴 것이다. 합의해 주면 2016. 5. 말경 문현동 아파트 분양을 할 예정인데 그때는 돈을 받을 수 있으니 분양을 마친 후 2016. 6. 말에 합의금을 지급하겠다.”라고 말하고, 피고인들은 2016. 4. 13. 부산 남구 소재 커피숍에서 C에게 “피고인 A와 E개발(대표이사: 피고인 B)이 연대하여 2016. 9. 말까지 2억 원, 2016. 12. 말까지 1억 원, 2019. 7. 말까지 1억 원 합계 4억 원을 지급하겠으니 약정금 청구를 취하하고 각 가압류 신청도 취하해 달라.”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피고인들은 F종합건설로부터 아파트 분양 후가 아니라 아파트 준공 후부터 5개월 이내에 양도대금을 받기로 하였고, 달리 재산이 없어 3억 원이라는 거액을 2016. 12. 말까지 마련할 수 없었으므로 C와 합의하더라도 합의금을 제때 지급할 의사나 능력이 없었다.
피고인들은 위와 같이 C에게 거짓말하여 이에 속은 C와 2016. 4. 13. 위 커피숍에서 ‘피고인 A, E개발은 연대하여 C에게 4억 원을 지급하되, 그중 2억 원은 2016. 9. 말까지, 1억 원은 2016. 12. 말까지, 1억 원은 2019. 7. 말까지 지급하고, C는 약정금 소를 취하하고 각 가압류 신청을 취하’하는 내용의 이 사건 합의를 하고, 2016. 4. 25. 부산지방법원 조정실에서 C로 하여금 위 합의 내용으로 조정에 응하게 하였다(이하 ‘이 사건 조정’이라 한다).
이로써 피고인들은 공모하여 C로부터 약정금 5억 4,000만 원을 4억 원으로 감액받아 1억 4,000만 원 채무를 면제받고, 각 가압류를 취하받아 C로부터 1억 4,000만 원 이상 재산상 이익을 취득하였다.
나. 제1심과 원심의 판단
제1심은 C가 이 사건 조정 당시 이 사건 사업부지가 대부분 E개발 소유인 것으로 알고 있었고, 피고인 B나 E개발의 연대보증 혹은 연대보증을 통한 감액은 피고인들이 먼저 제안한 것이 아니라 C가 피고인 측에 요구하여 왔던 사항이며, 피고인 B가 3억 원만 연대보증할 수 있다고 하여 담보력이 있는 E개발을 통하지 않고는 달리 회수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C가 이를 수락한 것으로 보이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결국 피고인들과 C는 E개발의 3억 원 연대보증을 반대급부로 하여 채권액을 4억 원으로 감액하고 가압류를 해제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인정된다면서,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E개발이 연대보증한 3억 원을 2016. 12. 말까지 지급할 의사나 능력이 없음에도, C에게 조기에 지급하겠다고 거짓말하였다.’는 공소사실 기재 기망행위에 대한 입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에 반하여 원심은, F종합건설이 당시 C와 법적 분쟁에 휘말리는 것 자체를 우려하고 이러한 우려를 피고인들에게 표시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피고인들이 C와 조속한 합의를 할 유인이 존재하였으며, 피고인들이 F종합건설로부터 위 아파트 사용승인 이후에 대금을 지급받기로 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약정 기한에 금원을 수령할 수 있는 것처럼 믿게 한 점, C가 주장하는 채권액이 근거 없는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점 당시 E개발이 별다른 자산이 없고 F종합건설의 E개발에 대한 사업권 양도대금 등의 지급시기가 2019년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 사건 합의 및 조정과 같은 내용으로 합의 및 조정을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종합하면 이 사건 조정으로 감액받은 약정금 채무 부분에 관한 사기의 공소사실은 유죄로 인정된다며 제1심판결을 일부 파기하고 피고인들에게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하였다(공소사실 중 가압류 취하 부분은 제1심의 무죄 판단 유지).
다. 대법원의 판단 : 파기환송
라. 쟁점
⑴ 위 판결의 쟁점은, ‘조정절차에서 사기죄의 기망행위 판단기준’이다.
⑵ 소송사기는 법원을 속여 자기에게 유리한 판결을 얻음으로써 상대방의 재물 또는 재산상 이익을 취득하는 범죄로서, 이를 쉽사리 유죄로 인정하게 되면 누구든지 자기에게 유리한 주장을 하고 소송을 통하여 권리구제를 받을 수 있는 민사재판제도의 위축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대법원 2004. 6. 25. 선고 2003도7124 판결 참조). 이러한 위험성은 당사자 간 합의에 의하여 소송절차를 원만하게 마무리하는 민사조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따라서 피고인이 그 범행을 인정한 경우 외에는 소송절차나 조정절차에서 행한 주장이 사실과 다름이 객관적으로 명백하고 피고인이 그 주장이 명백히 거짓인 것을 인식하였거나 증거를 조작하려고 하였음이 인정되는 때와 같이 범죄가 성립하는 것이 명백한 경우가 아니면 이를 유죄로 인정하여서는 안 된다.
소송당사자들은 조정절차를 통해 원만한 타협점을 찾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얻기 위하여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다소간의 허위나 과장이 섞인 언행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언행이 일반 거래관행과 신의칙에 비추어 허용될 수 있는 범위 내라면 사기죄에서 말하는 기망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는 없다.
통상의 조정절차에서는 조정채무 불이행에 대한 제재수단뿐만 아니라 소송비용의 처리 문제나 청구취지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잠재적 분쟁에 관한 합의내용도 포함될 수 있고, 소송절차를 단축시켜 집행권원을 신속히 확보하기 위한 목적에서 조정이 성립되는 경우도 있다. 소송당사자가 조정에 합의한 것은 이러한 부수적 사정에 따른 이해득실을 모두 고려한 이성적 판단의 결과로 보아야 하고, 변호사 등 소송대리인이 조정절차에 참여하여 조정이 성립한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조정에 따른 이행의무를 부담하는 피고가 조정 성립 이후 청구원인에 관한 주된 조정채무를 제때 이행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원고에게 신의칙상 주의의무를 다하지 아니하였다거나 조정성립과 상당인과관계 있는 손해가 발생하였다고 쉽사리 단정하여서는 아니 된다.
⑶ 아파트 시행사업을 하던 피고인들이 투자자인 피해자로부터 약정금 반환을 구하는 소를 제기 당하자, 조정절차에서 합의된 금전의 지급 재원이 될 아파트 시행 사업 양도대금의 지급시기에 관하여 조정 상대방인 피해자를 기망하여 이에 속은 피해자가 조정에 응함으로써 약정금을 감액받아 채무면제를 받았다는 이유로 사기죄로 기소된 사건임
⑷ 원심은, 피고인들이 피해자로 하여금 약정 기한에 금전을 수령할 수 있을 것처럼 믿게 하였고, 만일 조정절차에서 합의된 금전의 지급 재원이 될 아파트 시행 사업 양도대금의 지급시기가 약정기한인 2016년이 아닌 2019년이라는 점을 알았더라면 조정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등의 이유로 피고인들에 대한 사기죄의 공소사실을 일부 유죄로 인정하였음
⑸ 대법원은, 기망행위의 성립범위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소송사기에 관한 법리가 소송절차에서 이루어지는 민사조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는 점을 최초로 선언하면서, 피고인들이 민사소송의 조정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아파트 시행 사업 양도대금의 지급시기를 설명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곧바로 기망행위가 성립하였다거나 그로 인한 손해가 발생하였다고 할 수 없다고 보아, 이와 달리 판단한 원심판결을 파기·환송함
3. 소송사기의 성립에 관한 판례법리가 민사조정절차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지 여부(대법원 2024. 1. 25. 선고 2020도10330 판결) [이하 대법원판례해설 제140호, 황성욱 P.620-542]
가. 소송사기 일반론
⑴ 소송사기의 개념과 성립상 한계
㈎ 소송사기란 일반적으로 법원을 기망하여 자기에게 유리한 판결을 얻고 이에 기하여 상대방으로부터 재물 혹은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는 것을 말한다(대법원 2003. 7. 22. 선고 2003도1951 판결 참조).
㈏ 판례는, 소송사기의 처벌은 필연적으로 누구든지 자기에게 유리한 주장을 하고 소송을 통하여 권리구제를 받을 수 있다는 민사재판제도의 위축을 초래하고 본질적으로 민사분쟁인 사안을 소송사기라는 형사분쟁으로 비화시킬 위험이 있으므로 신중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대법원 2007. 4. 13. 선고 2005도4222 판결 등).
㈐ 이러한 판례의 태도는 소송당사자의 주장이나 소송자료의 진위가 수사를 통해 가려질 경우 사인 간 권리구제와 권리실현이라는 순수한 민사문제가 국가형벌권 내지 수사권을 통하여 결정되게 되어 국가공권력이 사적 영역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나, 형법 이론적으로도 소송사기를 폭넓게 인정할 경우 소송사기죄가 사법체계기능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는 결과를 초래하여 개인적 법익을 보호하는 사기죄가 사법체계기능의 보호라는 국가적(또는 보편적) 법익을 보호하는 규정으로 기능함으로써 사기죄가 침해범이 아닌 위험범으로 전환되는 문제가 있다는 점에 비추어 타당하다.
㈑ 뿐만 아니라 소송사기죄는 민사소송 당사자에게 허위주장이나 거짓증거 제출이 제한된다는 “진실의무(Wahrheitspflicht)”에 이론적으로 근거하고 있는데, 진실의무는 결국 신의성실의 원칙(민사소송법 제1조 제2항)에서 도출되는 것이다. 소송사기죄의 성립을 제한 없이 인정할 경우 신의칙과 같은 도덕원칙 위반을 형사처벌하는 것과 다름없어 법치국가 형법의 기본 원리인 형법의 보충성에도 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시효가 완성된 불량채권을 매입하여 추심행위를 하는 채권업자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는 있으나, 시효완 성된 채무자를 상대로 소를 제기하고, 회부된 조정절차에서 “깎아줄테니 일부라도 갚으라.”라고 말하여 시효이익 포기의 효과를 발생시키는 행위까지를 모두 사기죄로 처벌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 판례는 이러한 견지에서 그 소송상의 주장이 사실과 다름이 객관적으로 명백하고 피고인이 그 주장이 명백히 거짓인 것을 인식하였거나, 증거를 조작하려고 하였음이 인정되는 때와 같이 범죄가 성립되는 것이 명백한 경우가 아니면 이를 유죄로 인정하여서는 안 된다는 일관된 입장을 취하고 있다[대법원 2004. 6. 25. 선고 2003도7124 판결, 대법원 2007. 9. 6. 선고 2006도3591 판결 외 다수].
⑵ 소송사기의 주관적 구성요건요소
㈎ 소송사기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기망행위로 인해 법원이 착오를 일으켜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하고, 이러한 판결로 인해 피해자에게 재산상 손해가 발생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과 의욕(고의) 외에도 다른 사기죄와 마찬가지로 초과 주관적 구성요건요소로서 불법영득 또는 불법이득의 의사(존재하지 않는 권리를 주장하여 이득을 취하겠다는 의사)가 필요하다.
㈏ 소를 제기한 원고 측에 의한 소송사기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제소 당시에 그 주장과 같은 채권이 존재하지 아니한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주장 채권이 존재하지 아니한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허위의 주장과 입증으로써 법원을 기망한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 반대로 소를 제기당한 피고 측에 의한 소송사기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원고 주장과 같은 채무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채무 존재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 허위의 주장과 입증으로써 법원을 기망한다는 인식이 필요하다(대법원 2004. 3. 12. 선고 2003도333 판결 등 참조).
㈑ 따라서 단순히 사실을 잘못 인식하였다거나 법률적 평가를 잘못하여 존재하지 않는 권리를 존재한다고 믿고 제소한 행위는 사기죄의 범의를 인정할 수 없다[주관적 구성요건요소와 관련하여, 대법원은 피고인이 종중결의에 의하여 종중 소유 토지에 관한 등기 회복 사무를 수임한 후 피고인이 등기명의자들로부터 토지를 매수하였음을 원인으로 소유권이전등기청구소송을 제기하고 공시송달절차로 소송을 진행하여 피고인 승소의 확정판결을 받은 사안과 관련하여, 대법원은 청구 원인인 매매사실이 허위라 하여도 그 임야의 실질적 소유자는 위 종중이므로 위 회복등기는 실체관계와 부 합하고 등기명의자들은 아무 손해가 없을 뿐 아니라 피고인은 그 등기를 회복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그러한 짓을 한 것에 불과하므로 피고인에게는 사기의 범의가 있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한 원심을 수긍한 바 있고(대법원 1970. 9. 29. 선고 70도1698 판결), 소장에 이 사건 대지를 통로로만 사용하기로 한 매수조건을 위반하여 담장을 설치하였다고 기재한 부분은 다소 사실과 다르나, 이러한 청구원인 사실은 피고인이 사실 의 일부를 잘못 인식한 데에 기인한 것이거나, 존재한다고 믿는 담장철거청구권을 이유 있게 하기 위한 과장표현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서 사기의 범의를 인정하는 자료로 삼을 수 없다고 하면서 무죄로 판단한 원심을 수긍한 바 있으며(대법원 1992. 4. 10. 선고 91도2427 판결), 별도의 합의약정에 기하여 이미 소멸한 주식반환청구채권을 근거로 제소하였으나 그 제소 전에 변호사와의 상담을 통하여 소송을 통해 주식을 반환 받을 수 있다는 의견을 듣고 법률전문가가 아닌 피고인이 위 합의약정에도 불구하고 위 주식반환청구채권 이 존재하는 것으로 오인하여 제소하였다고 보고 편취의 범의를 부정한 원심을 수긍한 경우도 있고(대법원 1982. 9. 28. 선고 81도2526 판결), 피고인이 甲에게 아파트를 분양한 후 일부 대금을 지급받지 못하던 중 피해자가 위 채무의 일부를 인수한 후 차용증을 발행한 후 이를 변제하여 위 차용증의 효력이 상실하였음에 도 불구하고 甲으로부터 나머지 채무를 변제받지 못하자 위 차용증을 소지하고 있음을 기화로 위 차용증에 기하여 피해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의제자백을 받은 사안에서 피고인이 甲으로부터 6년이 지나도록 잔대금을 지급받지 못하고 있던 중에 甲이 피해자와 공모하여 위 아파트를 타에 처분하여 강제집행을 면탈 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어떻게든 피해자를 상대로 승소판결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제소에 이른 것이어 서 범의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유죄로 인정한 원심을 파기한 사례가 있다(대법원 1993. 9. 28. 선고 93도1941 판결)].
⑶ 소송사기의 객관적 구성요건요소
㈎ 소송사기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소송주체가 법원에 대하여 기망행위를 하고, 그 로 인한 법원이 착오에 빠져 통상 사기죄의 처분행위를 갈음하는 내용과 효력을 가진 판결을 할 것이 요구된다.
㈏ 일반 사기죄의 요건으로서의 기망은 널리 재산상의 거래행위에 있어서 서로 지켜야 할 신의와 성실의 의무를 저버리는 적극적 및 소극적 행위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착오를 일으키게 하는 것을 말하고, 반드시 법률행위의 중요부분에 관한 것임을 요하지 않으며 단지 상대방이 개별적 처분행위를 하기 위한 판단의 기초 사실에 관한 것이면 충분하나(대법원 2006. 10. 27. 선고 2004도6083 판결 등), 변론주의가 적용되는 소송절차에서 기망행위는 주로 허위 주장과 입증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 소송사기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허위의 주장이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 허위 라 함은 사실과 다름이 객관적으로 명백한 경우를 말하고, 명백하다는 것은 합리적 인 의심이 없을 정도로 입증된 것을 의미하며, 단순히 묵비한 경우만으로는 기망행 위가 된다고 할 수 없다. 즉, 당사자주의 소송구조하에서는 자기에게 유리한 주장이나 증거는 각자가 자신의 책임 하에 변론에 현출하여야 하는 것이고, 비록 자기가 상대방에게 유리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거나 상대방에게 유리한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을 위하여 이를 현출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상대방에게 유리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거나 상대방에게 유리한 사실을 진술하지 않는 행위만으로는 소송사기에 있어 기망이 된다고 할 수 없다.
㈑ 대법원은 피고인이 수표금 채권의 담보로 설정된 근저당권의 실행으로 일부 수표금을 변제받아 채권의 일부가 소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숨긴 채 수표금 전액의 지급을 구하는 소를 제기하여 공시송달로 소송이 진행된 결과 승소판결을 받아 이를 집행권원으로 하여 원래의 채권총액을 초과하는 배당금을 수령한 사안에서, 그와 같은 행위만으로는 소송사기죄에 있어 기망행위를 구성하지 않고, 사기의 고의 또한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피고인에 대하여 유죄를 인정한 원심을 파기한 바 있다(대법원 2002. 6. 28. 선고 2001도1610 판결 참조).
⑷ 기망행위의 대상
㈎ 기망행위는 법원의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항, 즉 소송의 승패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항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권리의 발생, 변경, 소멸 등의 요건사실에 관 한 법원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항이 이에 해당한다.
㈏ 그리고 사기죄의 기망행위는 처분행위와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소송사기에 있어서 처분행위는 법원의 재판이므로 소송사기의 기망행위도 법원의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소송법상 주요사실에 해당하는 사실에 관한 허위의 주장 또는 입증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나 주요사실을 추인케 하는 간접사실에 관한 기망도 포함한다고 봄이 상당한다. 한편 판례는 당해 소송절차에서 ‘법원의 심사대상’인 사항에 관한 허위일 것을 요구한다.
㈐ 허위의 주장과 입증이 소송의 승패에 영향이 있는 것인지의 여부는 제출 당시를 기준으로 판단하여야 하며(대법원 2004. 6. 25. 선고 2003도7124 판결 참조), 허위의 주장이 소송법상 전혀 무의미한 주장이라면 소송의 승패에 영향을 줄 수 없으므로 소송사기의 기망행위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소송법상 무의미한 주장의 예로는 대여금 청구소송에 대하여 자력이 있음에도 무자력 항변을 하는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이나, 다만 조정절차로 회부된 민사사건에서 무자력 항변으로 인하여 총지급액을 감액하는 내용으로 조정이 성립하였다면, 이를 소송사기와 유사하게 취급할 수 있는지가 문제 될 수는 있다.
㈑ 기망이 명백히 소송법상 무의미한 사항 또는 법원의 심사대상이 아닌 사항에 관 한 것이 아닌 한 법원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없다고 단정할 수 없고, 그러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소송사기죄의 불능미수에 해당할 수는 있다.
⑸ 기망행위의 유형
㈎ 증거 조작 또는 허위 증거 제출
당사자가 허위의 주장에 더하여 그에 관한 증거를 조작하거나, 허위의 증거를 제출하는 등의 행위를 하였다면 소송사기의 기망행위를 별 문제없이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 증거 조작이나 허위의 증거를 제출함이 없이 허위 주장만을 한 경우
① 판례는 증거조작이나 허위의 서류를 제출하는 행위가 없더라도 허위의 주장만으로 기망행위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은 甲회사의 경영자인 피고인이, 甲회사와 乙회사 사이에 허위로 작성된 물품공급계약서에 따른 공급을 완료하였음을 전제로 乙회사를 상대로 물품대금 청구소송을 제기하면서 증거자료로 위 물품공급계약서를 제출하였다가 그 후 소송을 취하한 사안에서, 피고인이 제출한 물품공급계약서는 물품공급의 목적이 아니라 乙회사 명의의 어음을 할인하여 자금을 조달할 목적으로 허위로 작성되었고, 실제로 물품이 공급한 사실도 전혀 없다는 이유로 피고인의 행위가 사기미수죄에 해당한다고 본 원심을 수긍하면서, “기망의 고의가 있는 경우에 허위의 증거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허위의 주장만으로 법원을 기망하기에 충분한 경우에는 소송사기의 기망행위가 될 수 있다.”라고 판시한 바 있다(대법원 2011. 9. 8. 선고 2011도7262 판결 등).
② 다만 판례에서 말하는 “허위의 증거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당사자의 주장이 법원 을 기망하기에 충분한 것”의 구체적 의미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에 대하여는 허위증거가 아닌 다른 증거방법에 의한 입증의 방법과 정도 등을 고려하여 허위의 주장만으로도 법원을 실제로 착오에 빠뜨리게 할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기망행위 인정 여부를 판단하는 입장과, 허위 주장의 내용 자체가 권리의 발생, 소멸 등과 직접 관련된 것이라면 입증 필요성이나 실제 입증방법이 제출되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기망행위에 해당한다고 보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③ 그러나 요건사실에 관한 허위진술만으로 소송사기의 기망행위를 인정하여 실행의 착수를 인정하는 것은 단순한 민사소송법상의 진실의무를 넘어 불이익 진술의 강제 에 다를 바 없는 점(민사소송의 피고가 원고의 요건사실 주장에 대하여 묵비하는 것은 자백간주의 효과를 발생시키게 될 것임), 민사소송에서 주장과 증거는 준별되므로, 주장만으로 요건사실을 입증할 수는 없고, 결국 증거관계에 있어 어떠한 허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는 상대방이 요건사실을 증명할 충분한 증거를 제출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지 법원이 착오에 빠져 그릇된 판단을 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판시의 의미를 해석함에 있어 후자의 입장을 취하기는 어렵다고 보인다.
⑹ 소송사기의 실행의 착수와 기수시기
㈎ 소송사기에서는 법원을 기망하여 재물 또는 재산상의 이익을 편취할 의사로 소송을 제기하거나(원고의 경우), 허위 내용의 서류를 제출한 때(피고의 경우)에 실행의 착수가 인정되고, 기망행위의 결과 당해 소송의 판결이 확정된 때에 범행이 기수에 이른다(대법원 1997. 7. 11. 선고 95도1874 판결).
㈏ 앞서 본 바와 같이 기망행위(허위의 주장과 입증)를 한 자에게 결과적으로 유리한 판결이 확정되었다 하더라도 소송상의 기망행위가 판결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것으로 인정된 경우에는 인과관계가 부정되어 기수 책임이 부정될 수 있고 미수범의 죄책을 부담할 수 있지만, 이러한 경우에는 실제로 주장한 권리가 존재하거나(원고 측에 의한 사기), 상대방이 주장한 채무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피고 측에 의한 사기)라고 보아 편취의 범의가 부정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나. 민사조정과 소송사기
⑴ 민사조정 일반론
㈎ 민사조정이란 소송에 의한 재판 이외의 대체적 분쟁해결제도의 하나로서, 중립적인 제3자(조정인)가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 당사자가 쉽게 협상하여 합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분쟁해결방법을 말한다.
㈏ 우리 민사조정제도는 조정담당판사가 일정한 경우 조정을 갈음하는 결정을 하도록 하는 등 직권주의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어 조정(mediation)과 중재(arbitration)가 결합된 조정중재(med-arb)와 유사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 민사조정은 분쟁관계인의 합의에 의해서 분쟁을 종지시키는 점에서는 화해계약과 동일하나 조정담당판사 또는 조정위원회 중개로 합의에 이른다는 점에서 자주적인 분쟁해결방법인 화해와 다르다.
㈑ 민법상 화해계약은 「당사자가 상호 양보하여 당사자 간의 분쟁을 종지시킬 것을 내용으로 하는 계약」을 말하며, 화해계약의 핵심은 당사자 간의 분쟁에 있어 상호 양보에 있으므로 당사자 간에 합의가 있더라도 상호양보의 내용을 갖지 않으면 화해계약일 수 없다. 일방의 주장을 전적으로 승인하는 경우에는 당사자의 약정에 의하여 분쟁을 종지시킨다고 하더라도 화해가 아니며 자백에 불과하다.
㈒ 반면 중재는 당사자의 합의에 의하여 선출된 중재인의 중재판정에 의하여 당사자 간의 분쟁을 종결하는 절차로서, 중재인에 의한 사적재판이란 점에서 당사자의 상호양보에 의해 자주적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화해 및 조정과 구분되며, 중재는 단심으로 종결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 민사조정은 조정신청사건과 조정회부사건으로 구분되는데, 조정신청사건은 당사자의 신청에 의한 조정으로 독촉절차에서 조정으로의 이행을 신청한 경우를 포함하고(민사조정법 제5조의2 제1항), 조정회부사건은 소제기 이후 수소법원이 회부한 조정을 말한다.
㈔ 조정신청은 서면이나 구술로 할 수 있고, 수소법원은 소송이 계속 중인 사건을 항소심판결 선고 전까지 결정으로 조정에 회부할 수 있는데, 실무상 민사조정사건 중 조정신청사건의 비율은 높지 않고 대부분은 수소법원에 의한 조정회부사건이 차지하고 있다.
㈕ 조정사건은 조정담당판사가 처리하고, 조정담당판사는 스스로 조정을 하거나 상임조정위원 또는 조정위원회로 하여금 조정을 하게 할 수 있다(민사조정법 제7조 제1항, 제2항). 수소법원 역시 스스로 조정기관이 되어 직접 조정을 할 수 있고, 이 경우에 수명법관 또는 수탁판사로 하여금 조정을 하게 할 수도 있다(민사조정법 제7조 제3항, 제5항).
㈖ 조정의 결과 당사자 사이에 합의가 성립된 경우에는 그 사항을 조서에 기재함으로써 조정이 성립되고 조정은 재판상 화해와 동일한 효력을 가지며(민사조정법 제28조, 제29조), 당사자 사이에 합의가 성립되지 않거나 합의내용이 부적당한 경우에는 조정불성립으로 사건을 종결하게 되는데, 조정담당판사는 그와 같이 사건을 종결하기 전에 상당한 이유가 없으면 직권으로 조정을 갈음하는 결정을 하여야 하고(민사조정법 제30조), 당사자는 조정을 갈음하는 결정을 송달받은 날로부터 2주일 이내에 이의신청을 할 수 있다.
㈗ 조정을 갈음하는 결정이 확정되면 재판상 화해와 동일한 효력이 있으나, 조정불성립으로 종결되거나 조정을 갈음하는 결정에 대하여 적법한 이의신청이 있으면 사건은 소송으로 이행 또는 복귀한다(민사조정법 제34조, 제36조).
⑵ 조정절차에서 이루어지는 허위, 과장과 ‘조정의 편취’
㈎ 조정절차는 소송 당사자의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제3자인 조정담당판사 또는 조정위원이 타협적으로 조정하여 원만한 합의에 이르는 절차인바, 금전지급청구 소송을 예로 들면 조정에 임하는 원고의 입장에서는 청구금액을 감액 없이 온전히 받아내고, 변제기나 분할지급 횟수를 최대한 줄이려고 할 것임에 반하여, 피고의 입장에서는 청구금액을 최대한 감축하고, 변제기를 최대한 늦추며 분할지급 횟수도 늘리고자 할 것이다.
㈏ 조정은 본질적으로 소송당사자가 처분할 수 있는 사항에 관한 「거래」 내지 「흥정」에 가깝다 할 것이다. 따라서 본인에게 유리한 결과를 얻어내기 위하여 다소 간의 허위와 과장 내지 읍소는 불가피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
㈐ 판례는 “일반적으로 상품의 선전․광고에 있어 다소의 과장, 허위가 수반되는 것은 그것이 일반 상거래의 관행과 신의칙에 비추어 시인될 수 있는 한 기망성이 결여된다고 하겠으나 거래에 있어서 중요한 사항에 관하여 구체적 사실을 거래상의 신의성실의 의무에 비추어 비난받을 정도의 방법으로 허위로 고지한 경우에는 과장, 허위광고의 한계를 넘어 사기죄의 기망행위에 해당한다.”라고 판시(대법원 2004. 1. 15. 선고 2001도1429 판결)하여 상거래에서 다소의 과장, 허위는 기망행위의 본질인 ‘기망성’을 갖추지 못한 것이라 보고 있다.
㈑ 그러나 본인에게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단순히 흥정을 성사시키기 위한 「조미료」로 치부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 적극적으로 허위 자료(변제자력을 감추기 위한 허위의 회계자료 등)를 제출하거나 명백한 거짓 주장을 하는 경우에는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가 문제 된다(이하 조정에 참여한 당사자가 적극적 사술을 통해 유리한 결과를 얻어내는 것을 ‘조정의 편취’라 부르기로 한다).
㈒ 단순한 허위, 과장 및 조정의 편취와 구분되어야 할 것은 존재하지 않는 채권을 주장하면서 허위 내용의 소장을 제출하거나, 위조된 증거를 제출하여 수소법원으로 하여금 조정 가능성을 오인케 하여 소송사건을 조정에 회부토록 하는 것과 같이 조정절차 이전에 이미 기망행위로 평가될 행위가 존재하는 경우라 할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법원에 대한 기망행위가 있었으므로 소송사기죄의 실행의 착수는 이미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뒤에서 살펴볼 소송절차와 조정절차의 차이점에 비추어 피기망자(= 법원)의 처분행위를 인정할 수 있는지의 문제는 여 전히 남는다 할 것이다.
㈓ 조정의 편취에 관하여는, 조정절차가 소송절차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제외하고는 채권, 채무자 사이의 자율적 교섭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는 사적 합의의 성질을 가진다는 점에서 사기죄의 포섭범위를 어떻게 정할지가 문제이다.
㈔ 일반적인 사인 간 교섭에 대하여는 판례상 기망행위나 사기죄의 성립에 특별한 제한이 없다. 판례는 “채무이행을 연기받는 것도 사기죄에 있어서 재산상의 이익이 되므로 채무자가 채권자에 대하여 소정기일까지 지급할 의사나 능력이 없음에도 종전 채무의 변제기를 늦출 목적에서 어음을 발행, 교부한 경우에는 사기죄가 성립한다.”라고 보고 있어(대법원 2007. 3. 30. 선고 2005도5972 판결 등), 단순한 변제기 연기도 사기죄의 재산상 이득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 조정절차에서 성립된 조정을 민사판결과 대등하게 취급한다면, 소송사기의 성립 범위를 엄격하게 판단하는 판례 법리가 적용되어 사기죄의 성립 범위가 줄어들 수 있는바, 먼저 소송절차와 조정절차를 비교하여 차이점과 공통점을 검토하기로 한다.
⑶ 소송사기의 구성요건적 측면에서 소송절차와 조정절차의 이동(異同)
소송사기의 구성요건적 측면에서 양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기망행위의 대상
① 소송사기에 있어 기망행위의 대상은 「법원」이다. 반면 조정절차에서 조정담당판 사나 조정위원의 역할은 합의의 「중개」에 불과하고, 합의의 주체는 재판부가 아닌 소송당사자이므로, 일방 당사자가 조정을 편취함에 있어 기망행위의 대상은 일반적으로는 타방 당사자로 보아야 한다.
② 대법원도 “실재의 채권액이 소정 외에서 신청된 화해신청서에 기재된 채권액과 차이가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당사자 간의 합의로써 소론과 같은 법정화해가 성립한 이상 법정화해는 재심의 소에 의하여 취소되지 아니하고서는 그 무효를 주장할 수 없다고 함이 본원의 종래 판례이므로 위의 당 법정화해는 당연 무효라는 논지는 채용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당사자가 합의에 의하여 소론과 같은 내용의 법정화해를 한 이상 그 화해내용이 실지의 법률관계내용과 다르다 하여도 다른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법원을 기망하여서의 사기죄가 성립된다 할 수 없을 것이므로 위와 같은 취지에서 한 원판결은 정당하다.”라고 판시하여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대법원 1968. 2. 27. 선고 67도1579 판결, 대법원 2004. 2. 13. 선고 2003도7402 판결).
③ 다만 조정회부결정 자체는 「법원」이 행하게 되는데, 조정의 편취와 관련하여 소장이나 조정회부신청서 자체에 기망적 성격이 포함되어 있거나, 일방 당사자가 재판부의 조정회부결정을 얻어내기 위해 허위의 증거를 제출하였다면(= 조정절차 이전에 기망행위가 존재하는 경우), 이를 어떻게 볼 수 있을지가 문제 된다.
④ 사견으로는, 조정회부결정 이전에 기망행위가 존재하였다 하더라도 조정절차에서 상대 당사자가 합의에 응하지 않는 경우 조정은 불성립으로 종국되고 소송절차로 복귀하게 되므로, 결국 조정의 성립 여부는 어디까지나 상대방 당사자의 의사 여하에 달려있는 것인 점에 비추어, 조정회부결정 전후를 구분하여 볼 필요는 크지 않다고 본다.
⑤ 한편 조정절차에서 조정담당판사나 조정위원에 의한 「중개」가 이루어지는 모습과 관련하여, ㉠ 단순한 사실행위로서 합의를 권유하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 ㉡ 당사자의 주장과 증거를 검토하여 구체적인 조정안을 제시하고 설득하는 경우, ㉢ 더 나아가 특정한 결론을 염두에 두고 당사자에게 합의를 적극 권유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의 경우에는 기망의 대상을 타방 당사자로 보는 것에 무리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지만, ㉡나 ㉢의 경우에는 법원이나 조정위원 또한 기망의 대상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고, 소송사기와 좀 더 유사점을 갖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처분행위
① 소송사기에서 처분행위는 법관의 서명날인이 존재하는 「법원의 판결」이다. 이에 비하여 조정절차에서 처분행위는 상대방의 조정수락 의사표시(또는 조정안에 대한 양당사자의 합치된 의사표시)로 볼 것인지, 아니면 집행력 있는 조정조서의 작성으로 볼 것인지가 문제 된다.
② 조정의 결과가 판결서가 아닌 법관의 기명날인이 되어 있는 「조정조서」에 기재되고, 조정조서의 집행력에 기하여 후속 절차가 진행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사자 사이에 합의되지 않은 사항을 조정조서에 기재할 수는 없다. 결국 조정조서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당사자 간의 합의내용이고, 법관은 이를 대외적으로 확인, 증명하는 역할에 그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조정절차에 있어 처분행위는 법관에 의하여 작성되는 성문화된 조정조서가 아닌 「당사자 간 의사표시의 합치」라 할 것인바, 이점에서 소송사기와 차이가 있다.
다. 조정의 편취에 대한 소송사기 판례 법리의 적용 가능성
⑴ 문제의 소재
㈎ 피기망자와 피해자가 서로 다른 삼각사기의 전형적 사례인 소송사기에 대하여 판례는 사기죄의 성립을 제한하기 위한 여러 법리를 선언하여 왔다. 그런데 소송절차에 부수한 조정절차에서 이루어지는 조정의 편취와 관련하여, 조정 편취 그 자체는 소송사기와는 기망행위의 대상, 처분행위에 있어 동일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은 앞서 본 바와 같다.
㈏ 그런데 조정의 사적자치적 측면에만 주목하여 사기죄의 성립을 무제한적으로 인정할 경우, 자칫 소송당사자가 사후적으로 조정조항을 이행하지 못한 경우 채권자가 조정 당시 감액 합의된 조정금의 원상회복이나 기한이익 상실과 같은 단서조항에 따라 권리를 실현하지 않고 형사고소에 의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는 분쟁의 일회적 해결이라는 조정절차의 이념에 배치되어 새로운 분쟁을 촉발시킬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조정기피 현상을 부추겨 조정 활성화를 통하여 고분쟁성 사건에 법원의 심리 역량을 투입하는 사법자원의 효율적 분배를 저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따라서 소송사기의 성립 범위를 엄격히 제한하는 판례의 법리를 조정 편취에도 적용할 수 있을지가 문제 된다.
⑵ 검토
민사조정은 당사자의 의사를 기준으로 조정회부 이전에 이미 당사자 간에 구체적 혹은 개략적인 합의가 선행되었고, 조정기일에서는 이를 성문화하거나 일부 다듬는 작업만을 거치는 사후 확인적 조정과 당사자 사이에 단순히 조정을 한번 해보겠다는 의사 정도만 있을 뿐 조정안에 대한 구체적 의사협의가 없는 상태에서 조정기일에 참여하는 형성적 조정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 그 본질이 사적 합의를 법원이 추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므로 소송사기에 관 한 판례 법리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는 반론이 가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후 확인적 조정에서도 조정을 주관하는 재판부는 기판력 저촉이나 집행불능과 같은 법률적 문제가 없는지를 확인하여 당사자들로 하여금 조정사항을 수정케 한 후 조정을 성립시키는 것이 통상적이므로 법원의 개입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며, 특히 변제기나 변제자력의 문제에 관하여, 소송실무상 자력이 없는 피고를 상대로 일단 「집행권원만을 신속히 부여」받기 위하여 원고가 조정에 응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소송사기에 관한 판례 법리 적용을 배제할 경우, 실제 성립 되는 민사조정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이러한 유형의 조정이 모두 사기행위로 평가 될 우려가 있으므로, 이러한 사후 확인적 조정에 대하여도 형성적 조정과 마찬가지로 소송사기에 관한 판례 법리가 적용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⑶ 대상판결(대법원 2024. 1. 25. 선고 2020도10330 판결)의 결론
이 사건에서 검사는 민사소송의 조정성립을 위해 피고인들이 한 언동을 기망행위로 평가하여 공소를 제기하였는데, 조정절차에서 사기죄가 문제 된 경우에는 소송사기죄와 마찬가지로 그 성립 여부를 엄격하게 판단하여야 한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피고인들이 위 조정 당시 지급하기로 한 금전의 지급 재원이 될 이 사건 사업 시행권한 양수대금의 지급시기에 관하여 명확히 설명하지 않은 것 이외에, 소송자료로 허위의 서류를 제출하거나 위증을 교사하는 것과 같은 적극적 기망행위를 한 사정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리고 C는 사채 중개업을 하던 사람으로서, 채권 회수를 위한 민사소송이나 조정절차에 관하여 어느 정도의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민사소송을 제기하면서 법률전문가인 변호사를 소송대리인으로 선임하였고 그 소송대리인이 조정절차에 참여하였으며, 합의된 조정조항에는 피고인 A의 금전지급 의무 이외에 C의 비밀준수의무와 손해배상의무도 함께 정해져 있었다.
따라서 C는 자신의 이해득실을 충분히 고려한 후 내린 이성적 판단의 결과로 위 조정에 응하였다고 볼 여지가 크고, 단순히 피고인들의 언행만을 믿고 선뜻 조정에 응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C가 민사소송을 제기할 무렵까지 약 10년 이상 피고인 A에 대한 채권을 회수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조정 당시 3회로 분할하여 지급하기로 한 약정금의 최초 분할지급기한과 마지막 분할지급기한이 3년가량이나 떨어져 있는 점이나 조정성립 당시 기한이익 상실에 관한 합의는 존재하였으나 지연이자에 관하여는 아무런 정함이 없었던 점에 비추어 보면, 피고인들과 C가 조정성립 당시 집행권원 획득이나 자력이 있는 E개발의 연대지급의무 부담 이외에 약정금의 지급시기에도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피고인들이 이 사건 조정 당시 공소외인에게 합의된 금전의 지급을 위한 유일한 재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건 사업 시행권한 양수대금의 지급시기에 관하여 명확히 고지하였어야 할 신의칙상 주의의무를 부담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특별한 사정을 찾을 수 없고, 결국 피고인들이 2016. 12. 말까지 C에게 3억 원을 지급할 의사와 능력이 없음에도 그와 같은 의사와 능력이 있는 것처럼 C를 기망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이와 달리 피고인들의 행위가 기망행위에 해당한다고 본 원심판단에는 조정절차에서의 소송사기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 결과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
⑷ 대상판결(대법원 2024. 1. 25. 선고 2020도10330 판결)은 소송사기죄의 성립을 엄격히 제한하는 판례의 법리가 민사조정절차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최초로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