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팔팔과 골골백세 사이에서.】《69세 어느 변호사님의 마지막 소식을 접하며.》〔윤경 변호사 더리드(The Lead) 법률사무소〕
오늘 아침, 법률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짧은 부고를 읽었다.
예순아홉의 한 변호사님이 홀로 히말라야 트래킹을 하다가 해발 5,000미터가 넘는 지점에서 쓰러져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분은 산을 사랑했고, 강인한 체력을 지녔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 선택한 길 위에 있었다고 한다.
아마 가족과 지인 등 남겨진 이들의 슬픔은 그 높고 깊은 산의 골짜기만큼이나 깊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이별은 언제나 잔인하다. 준비할 시간도, 작별 인사도 허락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같은 날, 또 다른 뉴스를 보았다.
우리나라의 건강수명이 65.5세로 떨어졌다는 통계.
수치보다 더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고통의 기간(유병기간)'이다.
사망할 때까지 질병이나 장애의 그림자 속에서 보내는 기간이 남자는 16.2년, 여자는 20.2년에 이른다는 숫자.
숫자는 차갑다.
하지만 그 안에는 치매, 파킨슨, 신장투석, 암 투병, 그리고 간병하는 보호자의 한숨이 들어 있다.
그 16년, 20년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밤잠과 고통의 눈물과 통장 잔고가 함께 깎여 나가는 세월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말한다.
구구팔팔 이삼사.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만 앓고 사흘째에 떠나기를 바라는 소망.
그러나 현실은 어쩌면 골골백세에 가깝다.
아픈 채로 오래 사는 삶.
의학은 수명을 늘렸지만, 그 끝이 반드시 평온해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건강한 상태로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다가, 예기치 않게 생을 마감하는 것이 오히려 ‘구구팔팔 이삼사’에 더 가까운 것 아닐까 하고.
‘돌연사’나 ‘사고사’는 남은 이들에게 큰 충격을 남긴다.
“왜 하필 지금이었을까.”
“조금만 더 함께할 수는 없었을까.”
그 질문은 오래 남는다.
하지만 이미 떠난 사람에게는, 고통도 두려움도 남지 않는다.
고통은 오히려 살아 있는 이들의 몫이 된다.
상실의 무게는 늘 생존자의 어깨에 얹힌다.
이런 생각이 혹여 고인의 유족이나 지인들에게 상처가 될까 조심스럽다.
나는 그분의 삶을 모른다.
그분이 남기고 간 사랑과 약속의 깊이도 알지 못한다.
다만 건강수명이 낮아졌다는 뉴스를 읽으며,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죽음을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는 선택할 수 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몸을 움직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하고, 스스로 의미 있다고 여기는 일을 계속하는 것.
어쩌면 진짜 구구팔팔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언제 떠날지는 알 수 없지만,
떠나기 직전까지 ‘나답게’ 살아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소망 아닐까.
그리고 오늘, 나는 조금 더 걷고, 조금 더 몸을 돌보고,
조금 더 다정해지기로 한다.
남겨질 사람들의 슬픔을 줄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오늘을 허투루 보내지는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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