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행하는 젊은 수도승’과 ‘앉아 있는 노승’ - 깨달음의 차이](윤경변호사)
한 젊은 수도승이 가파르고 험한 바위산을 숨을 헐떡거리며 올라갔다.
정상에 오른 순간 큰 바위 위에 앉아 평온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노승과 눈이 마주쳤다.
젊은 수도승은 불쑥 이런 질문을 던졌다.
“스님은 저랑 같은 신분으로 보이시는데, 아무런 고행도 하지 않고 저녁바람을 맞으며 편히 쉬고 계시는군요.
저는 짚신 사이에 뾰족한 돌멩이를 넣고 몸을 채찍으로 때리며 이 험한 바윗길을 올라왔는데 말이죠.
당신과 저는 왜 이렇게 다른 것입니까?”
노승은 아무 말 없이 자기 옆에 있는 편편한 돌을 가리키며 수도승에게 앉도록 권했다.
“지금까지의 힘든 고행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군요.
그런데 당신은 몸을 채찍으로 때리며 몸소 고난을 짊어지고 여기까지 오면서 하루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셨는지요?”
“그거야 물론 고행을 하는 거지요.
힘든 고통을 견뎌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다 써버린다면 다른 사람들한테 얼마나 관심을 돌릴 수가 있겠습니까?”
“제 자신만으로도 버거워서 지금은 남의 일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깨달음을 얻는다면 제 모든 관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두고 그들을 구원할 것입니다.
제겐 당신처럼 평온하고 안락한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습니다.”
그 후 오랜 침묵 끝에 노승의 깊은 목소리가 바위산을 타고 울려 퍼졌다.
“이렇게 하고 있어도 나에게 필요한 고통은 하늘이 알아서 보내준다네.
그러한 고통을 하나하나 극복해서 마음을 고요하게 한 다음 자애로운 마음으로, 지금껏 내가 알지 못했던 곳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비의 에너지를 보내는 것이 나의 기쁨이지.
인간은 자기 스스로 고통을 찾아 헤맬 필요는 없다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주어진 고통을 순순히 받아들여 그것을 통해 배우고 느긋한 마음으로 밝게 살아가는 것이지.
인간은 고통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기 위해 태어났다네. 매일 새로운 생명을 받아서 밝게, 감사하면서, 씩씩하게 살라고 창조된 존재지.
인간은 모두 깊은 곳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당신이 괴로워하면 다른 사람 역시 괴로움을 느낀다네. 마찬가지로 당신이 행복하면 다른 사람도 행복해지게 되지.”
하지만 젊은 수도승은 고개를 저으며 뾰족한 돌멩이를 하나 더 주워 짚신에 끼우더니 다리를 끌며 아무 말 없이 노승에게서 멀어져갔다.
바위 그늘에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노승을 뒤돌아본 젊은 수도승의 얼굴에는 석양빛과 함께 순간 맑은 미소가 빛났다.
그 뒷모습을 향해 노승이 중얼거렸다.
“그것으로 된 거야. 자신의 길을 가야지.
당신도 언젠가는 당신과 다른 사람들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샘에 도달할 걸세.”
축복으로 가득 찬 온화하고 조용한 음성이, 마치 바위산 꼭대기에서 맑은 물이 쏟아져 내리듯 산기슭으로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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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과 고통은 해가 뜨고 지는 것 만큼 불가피하다.
평온하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시련과 고통은 어김 없이 찾아 온다.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을 받는 것은 선택이다.
일부러 고통을 찾아 선택할 필요는 없다.
‘십자가(고통)를 등에 지고 가지 말고, 다정히 품에 안고가야 한다.’
신은 인간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은 주지 않는다.
고통을 거부하지 말고 공손히 받아들이면,
마음의 평온을 얻고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된다.
고행하는 젊은 수도승은 ‘노승의 젊은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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