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여행(10). 왜곡시킨 여행의 기억.】《나는 왜 슬픔을 기록하지 않는가.》〔윤경 변호사 더리드(The Lead) 법률사무소〕
여행기를 쓰다가 문득 펜을 놓았다.
화려한 여행지와 찬란했던 풍광을 묘사하던 손끝이, 갑자기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 글을 읽으면, 내 삶이 마냥 즐겁고 행복하기만 한 줄 알겠지?'
나는 여행을 다녀오면 의식(ritual)처럼 글을 쓴다.
휘발되어 날아갈 기억과 감정을 붙잡아두기 위해서다.
여행에서 스친 빛과 바람, 사람과 풍경이 그저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까워서다.
사진으로는 부족하고, 기억만으로는 허전해서 나는 글이라는 그릇에 내 감정을 담아둔다.
그런데 나에게는 한 가지 버릇이 있다.
나는 내 기억을 왜곡하고 편집한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는 알고 있다. 그 글 속의 ‘나’가 언제나 실제의 ‘나’는 아니라는 것을.
여행지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옷이 젖고 신발이 더러워져 짜증이 솟구쳤던 순간을, 나는 글 내용에 "빗방울이 보도블록을 적시는 운치 있는 오후였다"라고 적는다.
길을 잃어 다리가 퉁퉁 붓고 불안에 떨었던 시간을, "낯선 골목이 선물해 준 뜻밖의 모험"이라고 미화한다.
나쁜 감정에는 작은 문장을 붙이고 좋은 감정에는 풍선처럼 바람을 넣는다.
아마도 내 기억을 아름답게 보존하고 싶은 욕심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글 속의 나는 언제나 여유롭고, 지적이며, 행복에 겨워 있다.
그러다 보니 덜컥 겁이 났다.
나의 글이 타인에게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사람은 고민도 없고, 슬픔도 없고, 언제나 화려한 곳에서 좋은 것만 누리며 사는구나." 그런 오해 말이다.
사실은 나 역시 피로에 지치고, 사소한 일에 상처받으며, 때로는 여행지에서의 고독에 몸서리치는 나약한 인간인데도 말이다.
‘이 글, 계속 써도 될까?’
‘이 마음, 그대로 드러내도 괜찮을까?’
이런 생각에 기행문을 멈추려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본다.
도대체 나는 왜 기행문을 쓰는가?
기행문은 본질적으로 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다.
타인이 읽을지 모른다는 마음도 있지만, 결국 그 글을 가장 자주 읽는 사람은 나다.
몇 년 뒤의 나, 지금보다 조금 더 늙고 조금 더 지친, 그러나 여전히 새로운 길을 사랑하는 나 말이다.
내가 고통을 축소하고 기쁨을 과장하는 이유는, 그것이 내가 내 인생을 대하는 태도이자 생존 방식이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사실(Fact)은 바꿀 수 없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Viewpoint)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짜증을 짜증으로만 남겨두면 그것은 내 인생의 '나쁜 하루'로 기록되지만, 그것을 '운치'로 바꿔 적는 순간, 그날은 내 인생의 '낭만적인 하루'로 구원받는다.
미래의 나에게 좋은 기억을 남겨주고 싶은 것이다.
좋은 감정은 진하게,
아쉬운 감정은 희미하게,
내 마음이 선택한 색으로 칠해진 여행 기록을.
이것은 거짓말이라기보다는, 일부러 왜곡시킨 '기억의 연금술'이다.
납덩이 같은 무거운 현실을 황금 같은 추억으로 바꾸려는 치열한 노력이다.
남들이 혹시라도 나를 '항상 행복한 사람'으로 오해하는데 대한 구차한 변명이다.
내 삶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내가 불완전한 순간들조차 아름답게 바라보려 애쓰는 사람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기행문을 읽는 이들이 나의 행복해 보이는 문장 속에서, 행간에 숨겨진 '긍정을 향한 의지'를 읽어주면 고맙겠다.
나는 내 기억 속의 비를 낭만으로 바꾸고, 고단을 추억으로 조각한다.
그렇게 나는 글 속에서, 그리고 결국은 삶 속에서 더 행복해지려고 노력할 뿐이다.
기행문을 쓰며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여행은 지나가지만, 글은 나를 붙잡아 준다는 것을.
나의 기쁨을 풍선처럼 살짝 부풀려주고,
슬픔을 종이처럼 가볍게 접어두며,
마음을 정리하게 해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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