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여행(25). 몬산투(Monsanto), 바위와 시간이 속삭이는 곳.】《돌의 심장, 그 따뜻한 틈새를 걷다.》〔윤경 변호사 더리드(The Lead) 법률사무소〕
<바위와 인간 사이의 시간>
'가장 포르투갈다운 마을'이라는 칭호를 받은 몬산투(Monsanto)는 바위 '위에' 지어진 마을이 아니었다.
거대한 화강암 바위를 피하지 않고, 그저 그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곳.
집채만 한, 아니 아파트만 한 바위가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질 듯 집의 지붕을 짓누르고, 어떤 집은 거대한 바위 그 자체가 벽이 되어주었다.
태초의 시간을 간직한 화강암 거석들이 마을 곳곳에 뿌리 박혀 있고, 사람들은 그 거대한 자연을 거스르는 대신 기꺼이 지붕으로, 벽으로 삼아 삶을 꾸렸다.
자연 그대로의 커다란 바위들을 외벽이나 지붕, 주방 심지어 안방까지 자리를 차지하며 함께 조화를 이룬다.
자연을 이기려 들지 않고 그 품에 안겨 살아가는 이들의 지혜가 경이롭다.
이곳의 삶은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거대함에 기대어 겸손히 순응하는 법을 택했다.
<돌길을 오르며, 시간을 거슬러 오르다>
늦가을의 공기는 차가웠고, 발끝에 닿는 돌길의 감촉은 단단했다.
처음 그곳을 보았을 때,그것이 ‘마을’인지 ‘자연의 일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바위가 집을 덮고, 집이 바위에 기대어 있고, 돌담은 마치 바위의 피부처럼 이어져 있었다.
두 개의 거대한 바위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끼어 있는 집, 바위를 지붕 삼아 그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
이토록 거칠고 압도적인 자연 속에서도 삶은 이토록 따뜻하고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바위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저 틈을 내어주고, 기대어 살며, 거대한 돌의 무게를 함께 짊어졌다.
어쩌면 이곳 사람들은 바위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그저 함께 살아온 것이리라.
자연을 꺾지 않고, 그 품에 자신을 맞춰 살아가는 방식.
어쩌면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피할 수 없는 삶의 무게나 고난을 억지로 밀어내려 애쓰는 대신, 그것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기댈 때 비로소 진정한 평화가 깃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상에서 만난 바람과 고독>
숨이 턱에 찰 무렵, 마을의 전망대에 섰다.
몬산투 마을은 주변 평지에서 유일한 언덕에 형성된 마을로, 스페인 국경까지 이어지는 광활한 평야가 눈 앞에 펼쳐진다.
거침없이 불어오는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그것은 세상의 꼭대기에 홀로 선 듯한 고독감인 동시에, 이 모든 것을 품을 수 있을 것 같은 해방감이었다.
몬산투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저 아래 평야의 시간은 시계 초침처럼 흐르지만, 이곳의 시간은 수백만 년을 버텨온 화강암의 결을 따라 흐른다.
찰나의 순간에 기뻐하고 슬퍼하는 유한한 존재로서, 이 영원과도 같은 바위 앞에 서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은색 수탉이 지키는 자부심>
마을을 내려오는 길, '루카노(Lucano) 시계탑' 꼭대기에서 은색 수탉 한 마리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수탉’은 정의, 기적, 행운, 보호의 상징이며, 갈루 드 바로셀루스(Galo de Barcelos, 바로셀루스의 수탉)라는 전설에서 유래했다.
무엇보다 발길을 멈추게 한 건, 그 거대한 바위틈 사이에 걸린 빨래들이었다. 수억 년을 버텨온 차가운 돌덩이 아래, 오늘 아침 누군가가 널어놓았을 셔츠와 양말이 햇살을 받으며 팔랑거리고 있었다.
압도적인 대자연의 풍경 속에 스며든 지극히 사소하고도 따뜻한 생활의 냄새. 그 이질적인 어울림이 어찌나 정감 가던지.
포르투갈의 심장에서 만난 거대한 바위 마을.
몬산투는 내게 풍경이 아닌, 거대한 바위만큼이나 묵직한 삶의 태도를 선물해 주었다.
여행 가방에는 돌멩이 하나 담아오지 못했지만, 마음속에는 영원의 무게를 닮은 깊은 울림 하나를 담아 돌아간다.
몬산투는 인간이 자연을 정복한 마을이 아니라, 자연이 인간을 품은 마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품 안에서, 잠시 머물다 간 바람 한 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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