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윤경/수필

【삶의 무거움, 죽음의 가벼움】《죽음은 쓰다듬어서 맞아들여야지, 싸워서 이길 대상은 아니다. 이 가벼움으로 삶의 무거움을 버티어 낼 수 있다.》

윤경 대표변호사 더리드(The Lead) 법률사무소 2025. 5. 3.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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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거움, 죽음의 가벼움】《죽음은 쓰다듬어서 맞아들여야지, 싸워서 이길 대상은 아니다. 이 가벼움으로 삶의 무거움을 버티어 낼 수 있다.》〔윤경 변호사 더리드(The L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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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지인의 부고를 들었다.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었다.
그의 죽음은 예고 없이, 조용히 세상과 작별했다.
숨이 턱 막히는 소식. 가슴이 잠시 멎은 듯 먹먹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이 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이 공식이 깨지는 것 같다.
 
모임에 자주 나오고, SNS에 글이나 자신의 소식도 자주 올리고, 주변 사람들과 연락도 잘하던 친구에게서 갑자기 소식이 오랫동안 없다면, 그는 병고 등에 시달리거나 몸이 안 좋을 확률이 높다.
주변에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연락을 끊는 것이다.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지인들에게 소식이 오는데, 죽었다는 소식이다.
살아있다는 소식은 오지 않기 때문이다.
죽은 지 2-3년이 지나서야 죽었다는 소식이 오는 경우도 있다.
 
오래 누워서 앓던 사람들은 천천히 죽고, 건강하게 달리기를 하거나 골프를 하던 사람들은 갑자기 죽는다.
남의 집에 저녁 마실 온 듯이 문상 왔던 사람들은 몇 달 후에 영정 속에 들어가 절을 받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삶과 죽음의 무게를 저울질하게 된다.
“삶은 무겁고, 죽음은 가볍다.”
 
누군가 돌연사를 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갑작스런 비극으로 인한 애통함이나 공허함, 비통하고 허망한 느낌과 허무함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막상 죽은 사람은 어떨까?
죽은 사람은 죽었기 때문에 아무런 고통이나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죽은 사람’보다는 ‘살아있는 사람’이 그 죽음에 더 힘들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살아있는 자들이 느끼는 이런 고통보다 더 힘든 고통이 있다.
바로 신체적 질병이나 기능 이상 등으로 고통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분’들이다.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우리는 슬퍼하고 당황하지만,
죽은 자는 슬프지도, 괴롭지도 않다.
그 아픔은 오롯이 남은 자의 몫이다.
살아있다는 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게 바로 ‘삶의 무거움’과 ‘죽음의 가벼움’이다.
죽음이 이토록 가벼우므로, 그리 생각하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우리는 이 가벼움으로 남은 삶의 무게를 버티어 낼 수 있다.
 
퇴계 선생님의 유언이 떠오른다.
“매화에 물을 줘라.”
삶의 끝에서도 잊지 않았던 일상의 사소함.
그 소박하고도 평화로운 말 한마디가
죽음을 얼마나 가볍게 받아들였는지를 말해준다.
 
죽음은 쓰다듬어서 맞아들여야지, 싸워서 이길 대상은 아니다.
두려움의 대상도 아니다.
결국은 가볍다.
그 가벼움이 있기에
우리는 이 무거운 삶을 오늘도 살아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