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설과 비난 일색인 정치뉴스와 삶의 통제력】《난 국가가 내 인생을 책임져줄 것이라고 전혀 믿지도 않지만, 국가가 내 삶에 간섭하게 두고 싶지도 않다.》〔윤경 변호사 더리드(The Lead)〕
최근에 “트렌드코리아 2023”을 읽었다.
그 내용을 보면, 지난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이후로 양극화현상은 극에 달했다.
정치적 분열과 대립은 물론 빈부격차, 성별간의 갈등 등은 최고치로 증폭되었다.
국민들간의 갈라치기를 이용해 정치에 활용한 결과다.
2022년 9월에 열린 ‘경제발전경험공유사업 컨퍼런스’에서 세계적인 경제학자 대런 에스모글루(Daron Acemoglu) MIT 교수는 한국사회가 해결해야할 최우선과제로 “국민간의 정치적 분열과 대립과 해소”를 꼽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정치적 갈등은 매우 심각하다.
정치적 기사에 대한 댓글은 온통 욕설과 상대방에 대한 비난 투성이다.
그럴 때마다 창피하고 부끄러운 자괴감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이 사라진다.
요즘은 거의 지상파방송 뉴스를 보지 않는다,
온통 욕설과 허위사실만 유포하는 무책임한 정치인들의 뉴스만 나온다.
아침 신문의 헤드라인 정도만 볼 뿐, 그 내용은 자세히 읽지 않는다.
일부러 정치와는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다.
그 이유는 2가지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상대방을 비방하고 헐뜯는 ‘네거티브(Negative) 전략’을 구사한다.
히틀러가 사용한 대중선동의 기술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왜 상대방을 치켜세우고 존중해 주는 문화가 정치인들에게는 없는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네거티브(Negative) 전략이 포지티브(Positive) 전략보다 대중의 마음을 더 사로잡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자리에는 늘 소문이 따라 다닌다.
소문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다른 사람의 스캔들이나 악행을 전파하는 사람은 몹시 흥분되고 즐겁다.
반면 소문의 주인공은 고통과 괴로움에 갇혀 있다.
소문은 위험하지만, 항상 살아 남는다.
소문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속성 때문에 여전히 강력하고 잘 먹힌다.
악은 매혹적이지만, 선은 지루하다.
사람들은 ‘교훈적인 이야기’보다 ‘범죄물’을 더 좋아한다.
오랜 세월을 한결 같이 함께 산 부부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보다 혈투 끝에 갈라선 커플(Couple)의 사연을 듣는 것이 더 재미있다.
다른 사람들의 선행, 업적이나 잘난 척하는 것을 듣는 것보다 그들의 불행, 고난, 망가진 모습에 더 열광한다.
오랜 만에 만난 사람에게 “어떻게 지내세요?”하고 묻는다.
이때 상대방이 “잘 지냅니다.”라고 대답하면, 대화는 바로 끝난다.
잘 지내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가던 길을 가면 된다.
대화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상대방이 잘 지내지 못할 때’이다.
자동차 경주를 흥미롭게 지켜보는 이유는 단순히 자동차가 트랙을 미친 듯이 도는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관심을 끄는 것은 드물게 일어나는 ‘돌발사고’이다.
이를 목격하기 위해 몇 시간이고 경기를 지켜본다.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독수리 같다.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나면, 사고가 나지 않은 ‘반대 차선’에서도 정체가 발생한다.
기꺼이 도와주려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불행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사고를 당하지 않은 사실을 기뻐하고 짜릿한 전율을 느낀다.
정치권은 선보다 악이 팽배해 있다.
크고 실한 사과들이 들어 있는 상자에 썩은 사과를 집어넣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멀쩡한 사과들도 모두 썩어버린다.
반대로 썩은 사과들이 들어 있는 상자에 좋은 사과를 넣으면 어떨까?
그런다고 썩은 사과들이 다시 좋아지지는 않는다.
단 한 개의 좋은 사과도 함께 썩어버린다.
정치권에 존재하는 썩은 사과들이 좋은 사과들마저 점점 썩게 만들고 있다.
우리 국민들의 마음을 부패시키고 있다.
항상 남을 비난하고, 매사에 투덜거리고, 부정적이며,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습하고 어두운 분위기에 물들고 싶지 않다.
그게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 이유는 통제감 때문이다.
상당수의 국민들은 “국가가 내 인생과 노후를 책임지고 보장해 줄 것”을 당연시 여긴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일수록 정치에 더욱더 관심을 갖게 된다.
난 국가가 내 인생을 책임져줄 것이라고 전혀 믿지도 않지만, 국가가 내 삶에 간섭하게 두고 싶지도 않다.
누군가 내 삶에 깊이 관여하는 순간 인생의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통제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에 더 큰 즐거움을 느낀다.
자신의 힘으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즐거움과 성취욕을 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노력에 의해 무언가 이루어지는 그 놀라움을 경험하는 것은 커다란 만족감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경우라도 "내가 스스로 선택한 거야"라고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참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그래서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스스로 통제감을 갖기 위해서다.
누군가에 기대어 살겠다는 생각을 가지면 인생은 마른 논에 비가 오기만을 바라는 천수답이 된다.
그런 천수답처럼 난 정치나 국가에게 내 귀중한 삶을 맡기고 싶지 않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관계 없이 자신의 삶은 자신이 스스로 책임지고 영위하는 것이라는 통제감은 자신감과 행복감을 유발한다.
모든 것은 내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다.
그 것이 통제감이다.
내 머릿 속의 생각을 선택하는데 어느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다.
자신의 삶을 끝까지 책임지고 싶다면,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을 때' 행복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