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윤경/수필

[그 남자의 배신]【윤경변호사】

윤경 대표변호사 더리드(The Lead) 법률사무소 2015. 5. 5.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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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배신]【윤경변호사】

 

어제 오후 2시부터 시작된 4건의 미팅이 저녁 늦게 끝났다.

 

퇴근 전 졸리고 피곤한 몸을 달래려고 법인 앞에 있는 커피샵에서 진한 ‘에스프레소 더블샷’을 주문하여 마시고 있는데, 얼굴이 벌겆게 상기된 여자가 들어와 자리에 앉자마자 핸드폰을 힘차게 뽑아 들고 누군가를 향해 울분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일부러 엿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글쎄 나하고 철석같이 약속을 했다니까.”

<오호라. 무언가 심상치 않은 사건이 펼쳐질 것 같은데.>

 

“솔직히 먼저 들쑤신게 누구야! 지가 먼저 총대를 멘다고 하면서 일주일 넘게 나를 고문하길래 동조해줬더니 고마운 줄도 모르고 말이야. 그런데 하는 짓 좀 봐. 이젠 내 전화를 받지도 않더라구.”

<음. 무언가 한 줄기 배신의 바람이 불고 있군.>

 

“오늘 대표님 앞에서는 눈도 제대로 못 맞추더라니까. 날 부추기던 그 배짱은 다 어디로 간 거야?”

<뒤통수를 치는 것도 모자라 오리발까지! 하긴 ‘치고 빠지기’ 전법이야말로 배신의 기본이지.>

 

“대표님이 불러서 나도 처음에는 놀랐지. 그런데 이판사판이다 싶어 그냥 하고 싶은 말을 다해버렸어. 그런데 그 인간은 개미만한 목소리로 자기는 일을 이렇게 만들 의도가 아니었다나 뭐라나. 기막혀. 나만 완전히 찍혔지.”

<아니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당신도 분위기 봐가면서 변명 좀 하지 그랬어? 왜 혼자서만 독박을 다 뒤집어 쓴 거야?>

 

“에잇 몰라. 까짓것 나가라면 나가지 뭐. 절이 싫으면 중이 나가야지, 절보고 없어지라고 할 수 있냐? 그런 놈을 믿은 내가 잘못이지. 그러니까 그런 남자하고는 동맹을 맺으면 안된다니까.”

<어딜 가나 ‘절’은 수리하기 힘든가 보다. 늘 ‘중’이 떠나는 것으로 결론 나는 것을 보면…>

 

세세한 사건의 내막은 알 수 없으나, 대략의 상황이 이내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회사 내 중간관리자인 두 사람은 뜻을 모아 연대전선을 구축한다.

여자는 남자를 우방으로 생각하지만, 남자는 조금 다르다.

그런 그들에게 최근 무언가 불길한 조짐이 감지되었다.

불행히도 일이 틀어져 버린 것이다.

남자는 여자보다 빨리 사태를 파악했다.

더 이상 버텨봤자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노선을 급선회하기에 이른다.

‘납작 수그려’ 전략을 편 것이다.

사내판도나 정치상황을 읽는 데 민감한 촉수를 가진 남자는 먼저 대표를 찾아가 자신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가능한 조치를 취했을 수도 있다.

먼저 대표를 찾아가 기본적인 변명을 늘어 놓으면서 여자에게 허물을 다 뒤집어 씌우는 식의 선수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의 자존심은 변절을 허락하지 않는다.

 

잠깐 동안의 대화를 엿들었지만, 한편의 소설을 읽은 느낌이다.

그 비겁한 남자의 배신에 대해서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어느 조직에나 이런 비굴한 남자가 존재하나 보다.

 

“아 당신이 왜 그만둬요? 끝까지 버텨서 그 배신자의 말로를 꼭 보셔야죠”

하마터면 그녀에게 이렇게 소리지를 뻔했다.

 

진한 카페인의 효능 때문에 내가 흥분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