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만석 변호사님의 설니홍조(雪泥鴻爪)을 읽고】《좋은 추억은 마음 속의 난로와 같다. 언제든 되살아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준다.》〔윤경 변호사 더리드(The Lead)〕
예번에 잊고 있던 어릴 적 아련한 추억을 재생시켜 시간여행을 하게 만든 것이 드라마 “응답하라 1988”(2015)이었다.
응팔의 Ost는 가슴 깊숙이 고인, 어린 시절 추억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그 주제곡들은 목울대를 타고 올라와 마음을 애타게, 온몸을 아프게, 슬픔에 젖게 만든다.
오늘 아침 하만석 변호사님(연수원 17기)이 올리신 글을 읽었다.
이런 글을 읽으면 나 역시 옛날 생각이 나면서 울컥해진다.
이젠 추억을 반추하는 그런 나이가 되었나 보다.
사법고시 공부를 하던 우리 세대는 대부분 이런 비슷한 추억들을 가지고 있다.
하 변호사 님의 글을 그대로 올린다.
<설니홍조> [雪泥鴻爪(설니홍조) : 눈 위에 난 기러기의 발자국이 눈이 녹으면 없어진다는 뜻으로, 인생의 자취가 눈 녹듯이 사라져 무상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1.
진명 스님이 입적하셨다는 이야기는 오래 전에 들었었다. 그래도 우리에게 밥을 해 주시던 보살님은 계실 지도 모른다. 스님의 딸과 아들은 이미 장성하여 타처로 떠났겠지. 그 때 같이 공부했던 고시생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2021년 늦은 가을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강릉 대성사를 다시 찾아갔다. 사실 그날 내 발길을 그곳으로 이끈 것은 그 전날 읽은 소동파의 짧은 시 한 수이다.
"인생이 이르는 곳 무엇과 같은 지 아는가?
마치 날아다니는 기러기가 눈밭을 밟는 것과 같다네.
눈밭 위에는 우연히 발자국 찍혀 남겠지만
기러기 날아가면 동서 어디로 갔는지 어찌 다시 헤아릴 수 있으랴!
노 스님은 이미 세상 떠나 새 사리탑이 만들어지고
벽은 허물어져 예전에 적어 두었던 시 제목조차 알아볼 수 없구나.
지난 날 험한 산길 돌아가던 것 기억나지 않느냐?
길은 멀어 사람은 지치고 발을 저는 당나귀는 휘휘거리며 울어댔었지...
(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踏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 老僧已死成新塔 壞壁無由見舊題 往日崎嶇還記否 路長人困蹇驢嘶)"
소동파가 젊은 시절 동생 소철과 함께 과거를 보러 가는 도중 면지라는 지역의 어떤 절에 머물렀다. 그때 그 절 노 스님이 따뜻하게 맞아 주었고 소동파는 그 절 건물 벽에 시를 적어 두었던 일이 있었다. 세월이 흐른 후 다시 그 절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노 스님은 돌아가시고 시를 적어 놓았던 벽도 허물어져 있었다. 소동파는 그 때의 회포를 이 시로 지어 소철에게 보냈다. 설니홍조(雪泥鴻爪, 눈밭에 찍힌 기러기 발자국)라는 사자성어가 이 시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1000년도 더 지난 이 시가 나의 감성을 뒤흔들며 발길을 대성사로 이끈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2.
대학 3학년 때인 1984년, 사시 1차시험을 치고 그 결과를 기다리며 여름 방학을 맞아 동급생 몇몇과 배낭에 법서를 가득 넣어 짊어지고 대성사로 갔다. 강릉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명주군 학산리 예비군훈련장 입구에 내려, 탱자만한 풋사과가 자라고 있는 과수원을 끼고 난 산길을 따라 올라 절 마당에 들어섰을 때 진명스님이 우리를 맞아 주셨다. 작은 키에 햇빛에 그을린 까만 얼굴을 한 스님은 농약 분무기를 짊어지고 막 사과밭으로 내려가려던 참이었다. 스님은 분무기를 내려놓고 우리가 사용할 방을 가리켜 주고는 우리에게 식사를 해 줄 보살님을 소개해 주었다. 그 보살님은 스님의 아내였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2명의 자녀도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요사채 옆 마굿간에는 덩치가 제법 큰 소 예닐곱 마리가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그 절은 스님이 젊은 시절 직접 산을 깎아 터를 잡고 건축자재를 지고 와 지은 절이다. 세월이 흐르며 신도수가 늘어났고 그래서 새로 큰 설법용 강당을 신축하였다. 스님은 그 건축비를 조금이라도 충당하기 위해 신축한 강당을 고시생인 우리들에게 빌려 주었던 것이다. 강당 맞은 편 요사채에도 방이 여럿 있었는데 이미 한 방에는 서울대 대학원생이, 그 옆방에는 나이 많은 관동대학 복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었고, 몇일 후에는 기술고시 준비를 하는 한양대 공대생 몇명이 들어왔다.
절은 조용하고 주변 경관도 좋았다. 강당 뒤 수량이 많는 계곡에는 높이 5m 남짓의 폭포가 있었다. 우리는 거의 매일 점심을 먹고 나서 폭포 아래 소에서 멱을 감았다. 물 속 돌을 뒤집으면 제법 큰 가재들이 기어다녔다. 초등학생 스님 아들이 가재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개구리를 잡아 발을 실에 묶어 물 속 바위 틈새로 내리면 가재가 기어나와 집게발로 개구리를 물었다. 그 때 천천히 실을 끌어올리면 미끼를 놓지 않는 가재가 물밖으로까지 매달려 나왔다. 이 가재 낚시는 정말 재미있었다.
하루는 공대 선배 김일중과 둘이서 라면 끓이는 큰 코펠이 가득 차도록 가재를 잡았다. 차마 사찰 경내에서는 요리를 하지 못하고 저녁에 예비군 훈련장 옆 마을로 들고 내려갔다. 작은 가게에 부탁해 가재탕을 끓여서 우리 학교 공대생 법대생에, 관동대 복학생까지 모여 이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며 목소리 높여 노래를 불렀다. 김일중 선배는 '탁발승의 새벽노래', 또다른 공대 선배는 '삼팔선의 봄', 관동대 복학생 형님은 '청포도 사랑'을 불렀다. 나는 '해변의 여인'을 불렀다. 그 후로 우리는 한 팀이 되어 부근 망상해수욕장을 찾아 수영도 하고 대관령 아래 성산으로 가 유명하다는 성산 막걸리도 마셨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대 대학원생이 강릉 본가 다녀온다고 내려간 후 한참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다가 거의 보름만에 얼굴이 반쪽이 된 상태로 돌아왔다. 모두가 모여 무슨 일이 있었느냐며 걱정을 하자,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이며 고등학교에 다니던 동생이 다른 학교 불량학생들에게 폭행을 당해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이 사건은 한 동안 절의 분위기를 침울하게 했고, 우리들의 바깥 나들이도 뜸하게 만들었다. 어쨌든 그 해 여름 내 산사 생활은 이런저런 핑계로 피서에 가까웠고, 배낭 가득 메고 간 법서 중에 제대로 읽은 책은 채 1권도 되지 않았다.
3.
그러나 스님의 일상은 더운 여름에도 변함이 없었다. 매일 과수원으로 내려가 김을 매고 농약을 쳤고,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 풀을 베어 와 소에게 먹였다. 스님은 소들이 다 자라서 팔게 되면 강당 신축비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이라고 좋아하셨다. 방학이 끝나가는 8월말 우리들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지는 해를 보며 강당 앞마루에 걸터앉아 이런 저런 잡담을 하고 있을 때, 스님께서 우리들 옆에 와 앉으시며 '절에 왔으니 그래도 스님 말씀 하나는 듣고 내려가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이야기를 꺼내셨다.
당신께서는 깨달음을 얻고자 젊은 나이에 출가하여 해인사 송광사 등 여러 사찰 선방을 돌며 공부하였는데, 자신은 공부를 해서 도를 얻고 그 도를 통해 중생을 구제할 만한 그릇이 못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 대신 자신에게는 튼튼한 몸이 있기 때문에 그 몸을 움직여 중생을 구제할 것을 서원했다고 했다. 그래서 이 곳에 터를 딲고 몸소 건축자재를 지고 날라서 법당을 짖고, 신도들의 시주에 의존하지 않아도 절이 운영될 수 있도록 농지와 과수원을 개간하였다며, 이제 사과밭에서 수익이 나오기 때문에 강당 건축비만 청산되면 강릉시로부터 고아원 등 작은 규모의 시설도 위탁받아 운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당시 나는 장차 고시에 합격해 높은 자리에 올라 사회와 국가를 위해 큰 일을 할 것이라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스님의 말씀을 들은 이후, 큰 목표에 도달하기 전이라 하더라도, 설사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떤 목표를 이루게 되면, 어떤 지위에 도달하게 되면이라는 조건이나 정지조건부 기한은 지금 당장 행동으로 나서지 못한 것에 대한 핑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목표에 도달하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미래의 원대한 꿈보다도 지금의 작은 실천들이 쌓이면서 세상은 조금씩 선하게 바뀌어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대성사에서 그해 여름을 보내며 법률 공부는 한 게 별로 없지만 이렇게 평생 간직하게 되는 스님의 법(다르마)을 얻었다. 그것에는 소소하고 특별할 것 없은 나의 하루하루에 의미를 부여해 주며 다른 평범한 사람들의 삶으로부터도 나름의 특별함을 읽을 수 있게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조금씩 성장해 가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4.
2021년 다시 대성사를 찾았을 때, 예전 버스에서 내리던 예비군훈련장 앞은 동해시로 가는 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산 비탈이 짤려나가고 그 위로 거대한 다리가 놓여 있었다. 스님의 과수원 사과나무는 고목이 되어 빛바랜 잡초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사찰 경내에는 큰 법당과 요사채가 새로 지어졌고, 법당 앞에는 그 전에 없던 웅장한 팔각구층탑이 세워져 있어 좀 낯설었다. 인적 없는 마당에는 오색의 낙엽들이 늦가을 차가워진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다행히 내가 공부했던 강당은 예전 그대로였다. 강당 마루에 걸터 앉아 핸드폰으로 사진 몇 장을 찍고 일어서려는데, 건너편 요사채에서 나이드신 여자 스님이 방문을 열고 나오며 '어디서 오셨느냐'고 물었다. 오래전에 이 절에서 고시 공부했던 학생이었다고 대답하였더니 무척 반가워 하시며 자기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자세히 보니 우리에게 밥을 지어주시던 보살님이었다. 나를 뚜렷이 기억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보살 스님은 진명스님이 돌아 가신 후 새로운 주지 스님을 초빙하였어도 사찰 운영의 책임은 여전히 자기에게 있기 때문에 장소적으로는 거기가 거기지만 하여튼 자신도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했다. 진명스님은 오래전 농약 때문인지 폐에 이상이 왔고 그로 인해 입적하셨다고 했다. 초등학생이던 아들은 불화를 그리는 화가로 활동하고 있고 따님은 스님이 되었다고 했다. 절은 신도 중에 진명 스님 뜻에 감명받아 큰 시주를 하신 분이 있어 중창되었다고 했다. 사과밭은 진명스님 사후 돌 볼 여력이 없고 나무도 늙어 열매도 잘 맺지 않아 그 모양이라고 했다.
나는 당시 그곳에서 함께 공부했던 몇몇 고시생들의 소식을 말씀드렸다. 요사채에서 공부하던 서울대 대학원생은 검사가 되어 훌륭한 경력을 쌓으며 승승장구했는데 지청장 시절 강릉 고향집 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에 이르러, 벌써 오래전 일임에도 그 집안의 거듭된 비극을 떠올리고 두 사람 모두 눈시울 붉혔다.
보살스님은 저녁식사를 하고 가라고 붙잡았지만,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산을 내려와야 해서 일어섰다. 절 바깥까지 따라나와 손을 흔들며 배웅해 주시는 보살 스님을 뒤로 하고 돌아오면서 길섶에 있는 진명스님의 부도탑전에 들렀다. 나는 두 팔로 탑신을 안고 뺨으로 화강암의 냉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천년 전 소동파도 다시 찾아간 면지의 절에서 이런 감정에 사로잡혔던 것일까? 예전 우리 삶이 머물렀던 곳의 흔적은 눈밭의 기러기 발자국처럼 사라지지만 우리 가슴에 새겨진 어떤 기억은 세월이 흘러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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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다 읽고 나니, 나 역시 옛날 생각이 나면서 마음이 찡해진다.
좋은 추억은 마음 속의 난로와 같다.
언제든 되살아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좋은 추억일수록 울림이 오래 가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맛과 향이 풍부해 진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추억을 먹고 산다.
좋은 경험과 아름다운 추억이 많을수록 감성이 풍부해지고 사물을 보는 시각이 넓어진다.
추억은 지나온 생을 아름답게 만들고, 앞으로 영위할 삶을 기대와 흥분으로 두근거리게 만든다.
나이 들어 애틋한 추억이 없는 삶은 황량하고 무의미하다.
추억을 많이 가지게 되면 인생은 풍요로워진다.
일만 하지 말고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