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윤경/수필

【나이가 들어도 ‘삶아있음의 증거’는 무얼까?】《삶이 비극인 것은 우리가 너무 일찍 늙고, 너무 늦게 철이 든다는 것이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살이 온다. ..

윤경 대표변호사 더리드(The Lead) 법률사무소 2024. 3. 20.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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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도 삶아있음의 증거는 무얼까?삶이 비극인 것은 우리가 너무 일찍 늙고, 너무 늦게 철이 든다는 것이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살이 온다. 이렇게 살 수도 있고 이렇게 죽을 수도 있을 때 예순살이 온다.》〔윤경 변호사 더리드(The L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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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들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 위험하다고 말한다.

정상을 최종 목적지로 생각해 체력의 대부분을 오르는 데만 쓰기 때문에 내려갈 때는 체력이 고갈되는 경우가 많고, 체력이 떨어지면 판단력도 함께 떨어진 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등반의 성공 여부는 오르는 길이 아니라 내려오는 길에서 결정된다.

내려올 때 조심해야 한다.

올라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더 어렵고 힘들다.

 

나 역시 인생의 후반부로 들어오면서 나잇값을 제대로 하는지, 철부지 노인이 아닌지 살펴보게 된다.

지식은 많이 쌓였지만, 지혜는 모자란 것이 아닌지 말이다.

삶이 비극인 것은 우리가 너무 일찍 늙고, 너무 늦게 철이 든다는 것이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살이 온다.

 

이렇게 살 수도 있고

이렇게 죽을 수도 있을 때

예순살이 온다.

 

나이가 들어도 삶아있음의 증거는 무얼까?

일본 구로사와 아키로 감독의 영화 이키루(きる), 1952”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위 일본영화는 영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 리빙(LIVING): 어떤 인생, 2023”으로 리메이크되었다.

 

원작의 주인공 와타나베는 시청에서 민원을 담당하는 시민과 과장이다.

그는 비대한 관료주의 시스템에 매몰되어 영혼 없이 타성에 젖어 일하는 공무원의 전형이다.

복지부동과 무사안일 그 자체다.

어느 날 주민들이 찾아와, 동네의 커다란 물 웅덩이에 모기가 들끓고 있으니 아이들을 위한 공원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다.

그는 늘 그러했듯이 자기 소관이 아니라며 다른 부서로 떠넘긴다.

그런데 다른 부서들도 똑같이 대응하기에 주민들은 수많은 부서를 전전하게 되고, 서류는 결국 시민과로 되돌아오고 만다.

하지만 와타나베 과장은 그것을 그냥 책상 한구석에 처박아둔다.

이 대목에서 내레이션이 흐른다.

그는 시간만 때우고 있을 뿐이니까. 그는 산 적이 없다. 그래서 그는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와타나베는 자신이 간암 말기이고 살 날이 많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극도의 허무감에 사로잡힌 그는 어느 소설가와 함께 잠시 쾌락적인 생활을 하지만, 일시적인 도피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자신이 부서에서 함께 일하다가 인형 공장으로 전직한 여직원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와타나베는 그녀의 말과 표정에서 생동하는 기운을 발견하면서 지금까지 자신이 죽어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그에게 미이라라는 별명을 붙여놓고 있었다고 고백했는데, 시체처럼 지내온 인생을 정확하게 짚어준 것이었다.

 

와타나베는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이제 을 살아보겠다고 결심한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이제껏 덮어둔 공원 관련 민원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사무실에 복귀해 그는 관련 부서를 직접 찾아다니면서 담당자들을 설득하고 복잡한 규정과 절차를 면밀하게 검토한다.

그렇게 혼신의 힘을 쏟아 동분서주한 끝에 아담한 공원이 완성되고, 동네 아이들이 신나게 놀기 시작한다.

그날 밤 와타나베는 그 놀이터에 설치된 그네에 앉아 생을 마감한다.

인생은 인생은 짧다. 사랑하라 소녀여라는 노래를 부르며.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가짜 노동으로 채워지는 공허한 일에 매달려 있으면서 삶에 존엄성을 부여하기는 어렵다.

그는 주어진 일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면서 공동체에 헌신하고 기여하는데서 보람을 찾은 것이다.

어린이 놀이터에 열정을 쏟으면서 내면을 치유하고 인생의 목표를 수정했다.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 가슴이 열려야 존재를 회복할 수 있다.

불확실성의 구름이 짙게 드리운 미래, 온갖 걱정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일상을 건너가는 힘이 거기에서 우러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