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증(paranoia)에 걸린 나】《보호대를 착용하지 않으면 부상을 입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에 대뇌피질과 해마가 삼투압 현상을 일으키며 하염없이 쪼그라든다.》〔윤경 변호사 더리드(The L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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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차량의 문짝에 깊고 기다란 스크래치를 낸 적이 있다.
바빠서 수리를 하지 못하고 한 달 가량 타고 다녔다.
타는 내내 고물차라는 느낌이 들어, 매번 차를 탈 때마다 차를 바꾸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러다가 정비업체에서 “Pickup & Delivery” 서비스를 해주는 것을 알고 수리를 맡겼다.
차량 수리나 자동차점검 등을 위해 정비업체 기사가 아파트나 사무실로 와서 차량을 가져가고 점검 및 수리 후 다시 원하는 장소에 가져다 준다.
수리를 마치고 나니, 스크래치 흔적이 전혀 없는 깨끗하고 멋진 차가 되어 있다.
새 차를 사고 싶은 마음이 감쪽 같이 없어졌다.
겨울철 어느 날 아침 샤워를 하는데 온수가 나오지 않는다.
머리카락은 이미 찬물로 젖어 있는데 난감했다.
보일러 고장이다.
난방도 되지 않아 실내온도도 내려가자 한기가 느껴지며 시베리아 벌판에 벌거벗은 몸으로 추위에 떨고 있는 듯한 참담한 기분이었다.
겨우 보일러가 고장났을 뿐인데, 따뜻하고 안락했던 집안이 을씨년스럽고 으스스한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10여 년 살았던 포근한 보금자리였는데, 갑자기 이 집이 싫어지고 정이 뚝 떨어졌다.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싶어졌다.
그런데 웬걸!
즉시 달려온 수리기사가 와서 보일러를 교체하자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갔고, 이사 가고 싶은 마음이 바로 사라져 버렸다.
내 마음이 간사해서인지, 어떤 대상물이 사소한 문제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전체적인 성능 불량’으로 간주되어 버린다.
그런데 그 사소한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그 간사한 마음이 순식간에 없어진다.
그러니 신체의 경우는 더더욱 말해 무엇하겠는가?
몸의 일부분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관절이 아프다거나, 특정 부위에 통증이 있다거나, 소화불량이나 변비·설사를 겪거나, 불면증으로 숙면을 취하지 못하거나 하는 등 말이다.
우리 몸이나 인생도 마찬가지다.
고장이 나면 즉시 고쳐 정상적으로 잘 사용해야 하는 것이 정답이다.
방치할수록 손해다.
이런 얄팍한 마음 때문인지, 신체가 고장나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고, 미리미리 예방 조치를 하고 있다.
운동을 하다가 부상을 당할까봐 항상 보호대를 항상 찬다.
운동전문가인 PT 선생님의 조력을 받기 때문에 나름 부상 없이 안전하게 운동을 하고 있지만, 치과 의사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마우스피스(Mouth guards)를 착용한다. 그 다음 각종 보호대를 찬다.
오늘 보호대를 청결하게 세척하기 위하여 꺼내 보았다.
마우스피스(Mouth guards)를 비롯하여, 허리보호대(럼보트레인, SBD 벨트), 무릎보호대(게뉴트레인), 팔꿈치보호대(에피트레인), 발목보호대(말레오트레인), 손목보호대(메뉴트레인, 스트랩) 등 각종 신체 부위별로 다양하다.
사실 쓰지 않고 처박힌 보호대도 별도로 한 가득이다.
이렇게 많은 보호대를 막상 보고 나니, 내 스스로 소스라치게 놀란다.
내가 부상에 대한 ‘염려증’을 넘어, ‘강박증(obsession)’을 지나 “편집증(paranoia)”에 이른 것 같다.
보호대를 착용하지 않으면 부상을 입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에 대뇌피질과 해마가 삼투압 현상을 일으키며 하염없이 쪼그라든다.
심지어 푸른 하늘, 아니 휘트니스센터의 천장에 붕대와 목발이 보이는 환각까지 일어난다.
그런 내가 보조대를 착용하는 순간 입가에 매달린 불안한 미소가 사라지고, 안절부절 돌아가던 눈동자도 차분히 고정이 된다.
젊은이들은 모두 맨몸으로 운동하는데, 초췌하고 늙수구레한 나만 중세 갑옷을 입은 것처럼 여기저기에 보호대를 덕지덕지 걸쳤다.
내 청춘은 다 어디로 갔지?
거울 속 아저씨, 누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