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윤경/수필

ㆍ【‘100세 시대’라는 허상】《영생을 꿈꾸는 것은 모두 다 부질없는 환상이다. 생명의 유한성은 인간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지금의 삶에

윤경 대표변호사 더리드(The Lead) 법률사무소 2024. 11. 15.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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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시대’라는 허상】《영생을 꿈꾸는 것은 모두 다 부질없는 환상이다. 생명의 유한성은 인간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지금의 삶에 더 충실할 것을 촉구한다.》〔윤경 변호사 더리드(The L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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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고령인구가 급증해서인지, 요즘 부고 소식이 자주 들린다.
제미나이(gemini)에게 물어보니, 2023년 기준 우리나라 60세 이상 인구는 약 1,269만 명(전체인구의 약 17.5%)이고, 2023년 기준 100세 이상 인구는 7,634명이다.
이 말은 1,269만 명 중 1,268만 명이 100세 이전에 죽는다는 말이고, 이는 60세 이상 노령인구 중 99.93%가 100세 이전에 사망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2023년 기준 90세 이상 인구는 약 36만 7천명이므로, 90세 이전에는 1,269만 명 중 1,232.3만 명(97.1%)이 사망한다.
그리 보면, 70세 이후부터는 노령인구 중 상당수가 동시에 사망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매 10년마다  평균 4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통계를 보면, 100세 시대라는 말은 아직 허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런 통계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태초에 하느님이 뭇 생명들에게 수명을 정해줄 때였다.
당나귀, 개, 원숭이, 인간을 불러서 각자 30년씩의 수명을 주겠다고 하고 의견을 물었다.
당나귀와 개와 원숭이는 자신들의 삶이 고달프다며 하나같이 수명을 줄여달라고 애원했다.
인자하신 하느님은 그들의 처지를 딱 하게 여겨 당나귀에게 18년을 줄여주셨고, 개는 12년을, 원숭이는 10년을 각각 줄여주었다.
 
인간만이 30년의 수명이 짧다며 투덜거렸다.
마음이 넓으신 하느님은 인간의 불평도 받아들여 당나귀가 버린 18년, 개가 버린 12년, 원숭이가 버린 10년을 모두 인간에게 몰아주기로 하였다.
인간은 덤으로 얻은 40년을 합하여 70년이 수명이 생겼다.
 
인간은 본래 수명인 30년 동안은 즐겁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아주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후 18년 동안은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죽어라 일만 하는 당나귀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다음 12년 동안은 개처럼 묶여서 으르렁거리는 입만 가지고 살아야 했다.
마지막 10년 동안은 원숭이처럼 어리석은 짓만 하며 남이 던져주는 음식만 먹다가 생을 마치게 되었다.
 
인간은 오래 살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다.
그런데 오래 살려면, 고통과 괴로움이 따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조나단 스위프트가 쓴 ‘걸리버 여행기’는 장수가 아니라 아예 불사(不死)를 욕망하는 인간의 허욕을 드러내놓고 비판한다.
걸리버는 스트럴드브럭(struldbrug)이라는 불사의 인간들이 살고 있는 럭넥(Luggnagg) 마을을 방문한다.
스트럴드브럭들은 죽지 않는 대신 날이 갈수록 건강과 기억을 잃어간다.
탐욕과 독선, 역정과 심술로 가득차 있어서 그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품위는 찾을 길이 없다.
그들에게 그들에게는 비참하고 노추한 육체의 영생만 있을 뿐이다.
그제야 걸리버는 죽지 않고 늙기만 하는 존재가 얼마나 혐오스러운지를 깨닫는다.
 
영생의 참혹함을 그린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서 나온다.
티토노스(Tithonos)라는 한 잘 생긴 남자가 있었다.
새벽의 여신 에오스(Eos)가 이 남자를 보고 사랑에 빠졌다.
사랑해 눈이 멀면 누구나 그렇듯이 에오스도 앞뒤를 재지 못했다.
단걸음에 제우스를 찾아가 이 남자에게 영원한 삶을 갖게 해달라고 졸라댔다.
그 바람에 에오스가 실수를 했다.
영원히 사는 삶을 달라고만 했지 늙지 않는 삶까지 달라고 하는 것을 빼먹었던 것이다.
노인이 된 티토노스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게 됐고, 마침내 중얼거리며 온방 안을 휘젓고 다니는 망령이 났다.
잘 생긴 티토노스를 사랑했던 에오스는 정신까지 이상해진 티토노스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급기야 그를 매미로 만들어버렸다.
한여름에 끊임없이 울어대는 매미 소리는 제우스의 잘못된 선물 때문이다.
 
죽지 않는 사람들의 디스토피아는 아르헨티나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에도 나타난다.
주인공은 우여곡절 끝에 죽지 않는 사람들의 도시에서 도착하게 된다.
그러나 그곳에서 주인공이 깨달은 것은 영생은 곧 불행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도시에서 사람들은 아프거나 고통을 겪을 수는 있어도 끝내 죽지 않는다.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들의 도시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지옥이었다.
 
고대의 동서 영웅들도 불로든 영생이든 그들의 시도는 다 허망한 해프닝으로 끝났다.
진시황도 뜻을 이루지 못했고, 바빌로니아의 영웅 길가메시(Gilgamesh)도 영생에 실패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본능에서 나온다.
죽음의 공포는 삶에 대한 애착으로 이어진다.
오래 살고 싶고, 이왕이면 늙지 않고 영원히 살아서 미완의 삶을 완성하고 싶다.
이 소망이 불로장생을 꿈꾸게 한다.
 
장자가 한 말이 있다.
“굴뚝새가 깊은 숲에 둥지를 틀어봤자 가지 하나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쥐가 황하강에서 물을 마셔봤자 자기 배만큼만 마실 수 있다.”
인간이 아무리 날고 뛰고 발버둥 쳐봤자 잘해야 100세고, 돈과 명예와 권력이 하늘을 찔러봤자 천수를 넘기지 못한다.
천수란 하늘이 정해준 인간 생명의 유통기한이다.
 
영생을 꿈꾸는 것은 모두 다 부질없는 환상이다.
죽음이 행복이라는 것은 역설이지만 존재의 유한성 앞에 겸손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가치와 의미는 유한성에서 나온다.
건강도 한계를 느낄 때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
생명의 유한성은 인간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지금의 삶에 더 충실할 것을 촉구한다.
 
생사의 순환이 멈춘 불사의 세계는 끔찍하다.
불사란 모든 시간을 다 누린다는 것이고, 그 시간 속에 포함된 슬픔, 고통, 좌절까지 다 가진다는 뜻이다.
 
우리가 꿈꾸어야 할 소망은 따로 있다.
고종명(考終命)이다.
운명의 신이 정해진 천수를 평화롭게 누리다가 고통 없이 생을 마칠 수 있는 죽음의 복을 기원해야 한다.
물로 물론 신이 그 소망을 들어준다는 보장까지는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