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윤경/수필

【그녀는 어릴 적 고전을, 사람들은 아름다운 추억을 지켰다.】《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 천사가 차가운 날개로 우리의 얼굴을 후려친단다. 우리가

윤경 대표변호사 더리드(The Lead) 법률사무소 2025. 5. 14.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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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어릴 적 고전을, 사람들은 아름다운 추억을 지켰다.】《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 천사가 차가운 날개로 우리의 얼굴을 후려친단다. 우리가 잊은 소중한 기억들을 다시, 꼭 다시 떠올리게 하기 위해서.》〔윤경 변호사 더리드(The L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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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는 친구가 있다.
그는 도서관의 오래된 서가 사이를 천천히 걷는 걸 좋아했고, 책을 대출하러 갈 때면 늘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곳에 근무하던 사서 한 사람. 회색빛 단발머리에 조용한 눈동자를 지닌, 나이 가늠하기 어려운 여성.
 
그녀에게는 조금 이상한 습관이 있었다.
책을 대여하러 온 사람들에게 꼭 같은 질문을 던지곤 했다.
“당신이 인생의 성장기에 읽은 책 중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책은 무엇인가요?”
 
어떤 이들은 당황했고, 어떤 이들은 웃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오래된 주문처럼, 그 질문을 묵묵히 반복했다.
그러곤 대답을 들은 뒤, 책장들 사이로 사라졌다.
잠시 후, 신청한 책과 함께 한 권의 책을 더 가져오며 말했다.
“여기 있어요. 다시 읽어봐요. 그 시절의 당신을 만나볼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대여 기간은 충분히 연장해 줄게요.”
 
어떤 이들은 그녀의 친절을 의아해하며 책을 놓고 갔다.
또 어떤 이들은 기억의 서랍을 열며 힘겹게 제목 하나를 꺼내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조용히 말하곤 했다.
“설마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갯츠비』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없이 성장기를 보냈겠어요?”
 
그녀는 낡고 먼지 낀 고전을 서가 깊숙한 곳에서 꺼내 와 건넸다.
그 순간, 누군가는 사춘기의 자신과 다시 마주했고,
누군가는 잠 못 들던 밤의 감수성과 고독을 불러냈다.
 
도서관의 접수대 앞에는 늘 긴 줄이 생겼다.
바쁜 이들은 투덜거렸지만, 대다수는 다른 이들의 대답에 귀 기울였고,
어떤 이는 일부러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척하며 그녀의 선택을 기다렸다.
 
그녀는 사서였지만, 동시에 청취자였다.
사람들의 말 속에서 잊힌 마음들을, 오래된 문장들을 하나씩 꺼내 보듬는 사람.
그녀는 늘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사람들의 시간을 거슬러 책을 건넸다.
그 모습은 마치 책 속에서 건너온 시간 여행자 같았다.
 
하지만 어느 날, 그 친구가 도서관을 찾았을 때 그녀는 더 이상 거기 없었다.
은퇴했다고 했다.
 
친구는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성장기의 감수성을 떠올릴 수 있는 귀한 기회를 만들어 줬어요.”
 
그러자 후임 사서가 조용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건 그녀의 본심을 오해하신 겁니다.
그녀는 사람들의 성장기보다는, 책들의 ‘생명’에 관심이 있었어요.
5년 동안 대여되지 않으면 폐기되는 도서관 규정이 생긴 뒤부터,
그녀는 그 규정에 저항하기 시작했죠.”
 
그녀가 건넨 책들은, 곧 폐기될 예정이던 책들이었다.
하지만 단지 ‘남겨두기 위해’가 아니라,
‘누군가의 손에 다시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최종 결정은 독자들의 몫이었다.
그녀는 말했단다.
“아무도 읽지 않는 책들은, 나조차도 구원할 수 없어요.”
 
친구는 도서관을 나서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진짜 관심은 책의 수명, 그리고 그 책이 닿을 누군가의 마음이었다.
 
혹시 우리가 어린 시절 좋아했던 책들도
그녀 덕분에 더 오래 숨 쉬었을까?
 
비록 그녀의 뜻은 책에 있었을지 몰라도,
그녀의 방식은 사람들에게도 깊은 자취를 남겼다.
 
기억 속에 숨은 책 한 권이, 우리 마음속 감수성을 다시 꺼내줄 수 있다는 것.
그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믿었고, 조용히 실천해 왔던 것이다.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잊힌 책들이 폐지되지 않도록,
우리의 애틋한 추억이나 잊지 못할 경험도 그렇게 망각 속에 버려지지 않도록.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
천사가 차가운 날개로 우리의 얼굴을 후려친단다.
우리가 잊은 소중한 기억들을
다시, 꼭 다시 떠올리게 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