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때 묻은 물건들과 함께 하는 보잘 것 없는 행적과 허비한 시간만이 내 몫이다.] 【윤경 변호사 더리드(The Lead)】
<시간을 머금은 생활도구만을 즐기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다.>
가족모임을 가졌다.
아이들과 사위가 선물을 내민다.
선물 2개 모두 볼펜이다.
정말 마음에 든다.
판사 시절부터 써 온 볼펜이 있다.
20여 년간 내 곁을 지켜 준 ‘몽블랑(Montblanc) 볼펜’이다.
난 만년필보다 볼펜을 더 즐겨 쓴다.
메모를 하거나 글을 쓸 때 뿐만 아니라 결제서류에 서명을 할 때도 만년필보다는 볼펜을 주로 사용한다.
볼펜의 묵직한 무게감은 무게중심을 잡아주어 안정감을 준다.
고급스런 금속 재질에 새겨진 작은 홈들은 미끄러움을 방지하면서도 매우 부드럽고 자신감 있는 터치감을 선사한다.
일반 볼펜보다 지름이 커서 그립감도 매우 좋다.
볼펜똥이 전혀 생기지 않고, 잉크가 흘러내려 옷에 얼룩을 만드는 일도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
물처럼 부드러우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볼펜심의 굵고 강렬한 흔적은 인상적이다.
명성에 속박되지 않는 자연스럽게 흐른 글씨의 멋이 풍길 때 그 필기도구는 돋보이는 것이다.
삶에 지친 중년이든 세상이 만만하고 우스워 보일만한 젊음이든 남자들에게는 그들만의 물건이 있다.
커피그라인더나 라이터든, 수첩이나 스케치북이든, 안경이나 만년필이든 그것이 비록 잡다하고 보잘 것 없는 물건이라도 그 남자와 함께 해를 거듭할수록 아름다워진다.
시간을 머금은 그 남자의 물건은 그의 일부가 되고 삶의 추억이 되는 것이다.
제대로 된 생활용품을 즐기는 것은 큰 기쁨을 준다.
나처럼 글쓰기를 좋아하고 자주 메모를 하는 사람에게는 말이다.
궁핍하지만 남루할 것도 없는 우리의 삶을 예찬하는 남자들의 방식이다.
볼펜뿐 아니라 발이 편한 운동화도 너무 좋아한다.
이런 것만 누리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다.
인생의 일부가 되어 준 ‘몽블랑(Montblanc) 볼펜’은 퇴역식을 갖지만, 추억의 물건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젊음이 갖는 화창한 봄날의 풍경은 이제 내 차지가 아니다.
손 때 묻은 물건들과 함께 하는 보잘 것 없는 행적과 허비한 시간만이 내 몫이다.
시간을 머금은 그 물건들은 삶 속에 또렷하게 추억을 새기며 삶의 아름다움을 들추어 보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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