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리단의 당나귀(Buridan's Ass)】《“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최악의 선택”보다 더 불행하다.》〔윤경 변호사 더리드(The Lead)〕
<어리석은 당나귀>
어느 날 허기진 당나귀가 길을 가다 먹음직스런 건초(乾草)더미 두개를 발견했다.
그것은 행운이 아니라 불행의 시작이었다.
두개의 건초더미는 서로 비슷해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우측더미로 가면 좌측더미가 더 많아 보였고,
좌측더미로 가면 우측더미가 더 크고 먹음직스러웠다.
결국 당나귀는 두 건초더미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아침에 굶어 죽은 채 발견되었다.
“부리단의 당나귀(Buridan's Ass)”라는 이야기이다.
<결단의 중요성>
쟝 부리단(Jean Buridan 1295-1358)은 중세 프랑스 스콜라 철학자이다.
이 이야기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지만, 그의 저작물(著作物) 어디에도 위 일화는 나오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에서 처음 나왔다.
‘우유부단’과 ‘어리석은 망설임’에 관한 일화이다.
복수의 선택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을 “부리단의 당나귀(Buridan's Ass)”라고 부른다.
소설이나 철학책에서 자주 인용된다(두 여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 등).
우리는 날마다 선택의 기로에 있다.
인생의 선택에는 정답이 없다.
걸어보지 않고서는 그 길이 나은 선택인지 알 수 없다.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최악의 선택”보다 더 불행하다.
선택 앞에선 신중함이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선택이 최선이라 생각하고 확실하게 밀어 붙이면서 그 길을 착실하게 걸어가는 것이다.
기회가 왔을 때 활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세월을 허송한다면,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의 묘비명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가 내 묘비명이 된다.
“부리단의 당나귀”가 되는 것은 한 곳에 마음을 정하지 못하거나, 귀가 지나치게 얇거나, 파랑새만을 쫓기 때문이다.
‘선택(결단)을 하지 않은 후회’는 늘 뒤늦게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