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윤경/수필

【행복의 또 다른 길, 설단현상과 건망증】《행복은 좋은 건강과 나쁜 기억력이다.》〔윤경 변호사 더리드(The Lead)〕

윤경 대표변호사 더리드(The Lead) 법률사무소 2023. 1. 7.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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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또 다른 길, 설단현상과 건망증】《행복은 좋은 건강과 나쁜 기억력이다.》〔윤경 변호사 더리드(The L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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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대화를 하다가 수시로 그거 뭐더라?”, “그 사람 있잖아?”라고 팔을 휘젖으면서 기억을 해내지 못해 더듬거리는 설단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영화 주인공의 이름이나 심지어 친한 친구의 이름조차 기억해 내지 못할 때가 있다.

 

옛날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젊었을 때는 잘 못 느꼈는데

 

무언가를 기억해 내는데 머릿속을 한없이 더듬적거리게 될 때 나도 모르게 가끔 이렇게 궁시렁 대곤 한다.

사물 이름이나 낱말 하나가 생각나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하고 막막해진다.

마음의 눈에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훤히 보이는데, 그걸 언어로 생각해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아예 가물가물하다가 그냥 사라져 버리는 거다.

재채기가 막 터질 듯 터질 듯하다가 제풀에 스스로 가라앉아버릴 때처럼.

 

독서를 자주하는 편인데, 기억력 때문에 이걸 계속 해야하나 하는 깊은 회의에 빠지곤 한다.

읽은 내용이 며칠이면 송두리째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머릿속에는 대청소라도 했는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어떤 때는 읽은 사실조차 기억이 나지 않아서 가지고 있는 책을 새로 산 일도 여러번 있다.

 

그럴 때 마다 콩나물 시루를 생각하며 마음을 토닥이곤 한다.

물을 주면 빠져나가고 말지만, 어느새 콩나물은 그 물로 몸을 적시며 훌쩍 자라고 있던 거다.

나 역시 부지런히 읽다보면 내 정신의 콩나물이 조금씩 자라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스스로 위로해 본다.

 

나는 기억이 가물거리는 변화를 인정하기로 한다.

내 기억을 불신하기 보다는 망각은 노화의 자연스런 단계임을 받아들인다.

사실 망각은 인지기능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노인들만 건망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잊어버리며 살고 있다.

 

오히려 과거에 발생한 일들을 모두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다면, 이게 비극이다.

그건 쓰레기더미와 같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뒤죽박죽이 돼서 이제는 그 기억들이 다 의미가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하루하루의 일들을 다 기억하는 것보다는 그 중 의미 있는 시간을 기억하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는 더 중요하다.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저주받은 사람들의 뇌는 물건이 너무 많아서 흘러넘치는 벽장과도 같다.

문을 열면 온갖 물건들이 눈사태처럼 쏟아져 나오는 벽장 말이다.

망각이란 뇌가 부지런하고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쓰레기로 뒤덮힌 길을 잘 정리정돈해 주는 일과 같다.

 

다람쥐는 가을에 밤, 도토리 등을 주어다가 여기저기 땅속 깊숙이 묻어두는데 건망증 때문에 묻어둔 곳을 잊어버려 상당수를 열매를 못찾는다고 한다.

그 못찾은 씨가 나중에 눈이 터서 나무로 자라는데, 그 나무가 마침내 숲을 이루고 그 숲이 또 새를 불러들인다.

 

행복은 좋은 건강과 나쁜 기억력이다.

잊고 사는 것이 행복하다.

그건 낙엽이 지는 것과 같은 자연의 순리다.

때가 되면 그렇게 견고하게 붙어있던 낙엽잎도 낙엽이 되어 떨어지지 않던가.

우리 기억들도 머릿속에서 떨어져나가는데, 의미 없는 것부터 하나하나 털어낼 수 있다면 그건 좋은 일이다.

소중한 것만 남아있을테니까.

 

낙엽이 지면 산속이, 세상이 훤하게 잘도 보이지 않던가.

머리 속의 쓰레기더미를 치우고 나면, 인생의 중요한 것들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니 잊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잘 잊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