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난 통상 부고를 받으면, 당사자 본인에게 별도로 문자를 보내 내 마음을 전달한다. 고인과의 추억이 있으면 그 내용을 담고, 고인을 잘 모르면 상주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정성껏 쓴다.》〔윤경 변호사 더리드(The Lead)〕
시대가 변하다보니, 지금은 단톡방 시대이다.
각종 모임 일정이나, 자녀 결혼, 부고 등은 단톡방을 통해 연락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가끔 단톡방에 한 번에 ‘수십 통의 메시지’가 온 것을 볼 때, ‘부고가 날라왔구나’라고 짐작을 한다.
열어보면, 정말 ‘부고’가 맞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글이, 그것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마치 한 글자라도 틀리면 하늘이 무너질 듯이, 조심스럽게 다른 사람의 메시지를 복사해 붙인 것처럼 똑같은 문장이 기계적으로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난 통상 이런 부고를 받으면, 당사자 본인에게 별도로 문자를 보내 내 마음을 전달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상투적이고 진부한 클리쉐(cliché)를 쓰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을 한다.
고인과의 추억이 있으면 그 내용을 담고, 고인을 잘 모르면 상주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정성껏 쓴다.
내가 위로의 마음을 전달하려는 상대방은 슬픔과 상심에 젖은 고인의 가족이지, 단톡방에 가입되어 있는 수백명의 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리도 없겠지만, 혹시라도 내가 단톡방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낸다고 하여 ‘귀찮고 짜증나는 스팸메일이 또 전송되었구나’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전혀 없을 것이다.
어떤 심리학자는 ‘단톡방의 이런 트렌드’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분석한다.
첫째는 기존의 부조에 관한 아날로그식 전통이 디지털화된 단톡방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고인의 가족’ 입장에서는, 많은 부조 메시지를 전달받았음을 많은 사람들이 보는 것에 대해 ‘내가 헛되이 살지는 않았구나’라는 뿌듯함과 과시욕을 선사해 준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이런 부조메시지를 보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신도 같은 입장에 처 있을 때 상응하는 메시지를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 사회적 집단에서 소외되거나 불이익을 받고 싶지 않다는 연대감, 자신의 사회적 존재감 내지는 건재함을 타인에게 표출하고 싶은 욕망 등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분석이 전부 맞는다고 동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난 수백명의 지인이 상투적이고 진부한 클리쉐(cliché)를 단톡방에 무성의하게 남기는 것보다는, 단 몇 사람에게서만이라고 개인적인 위로의 문자를 받고 싶다.
불행하게도 난 그런 기회를 누리지 못할 것이다.
이미 부모님이 돌아가셨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