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본된 법서 버리기】《내 서재에서는 더이상 귀족적 위엄이나 전통적 근엄함은 찾아볼 수 없다.》〔윤경 변호사 더리드(The Lead)〕
왜 그런 원칙을 가지게 된 건지 근원은 알 수 없다.
나에게 그런 원칙을 가르쳐준 사람도 없었고, 그 원칙을 실천해 보인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어쩌다 그런 원칙을 가지게 된 걸까?
어쨌거나 나에겐 책에 관한 나만의 원칙이 있었다.
“책을 사는 돈만큼은 절대 아끼지 않는다. 책을 소중히 여기고 절대 책을 버리지 않는다.”
학창시절 형님들과 함께 지내는 누추한 공부방에서도 내 책만큼은 티 없이 정갈했다.
모든 책을 달력으로 표지를 씌웠다.
책 윗면과 겉표지 안쪽에는 책도장도 찍었다.
고시공부를 할 때는 법서를 사자마자 깨끗한 비닐을 씌워서 조심조심 읽었다.
그럼에도 그 방법은 금방 한계를 들어냈다.
더운 하숙집 방에서 비닐들은 서로서로 몸을 붙이기 시작했다.
더우면 떨어져야 시원할텐데, 비닐들은 무자비하게 서로의 몸을 밀착시켰다.
서재를 만들면서 검은 색의 고급원목으로 책꽃이들을 맟춤제작하였고, 수천권의 책으로 가득 채웠다.
책을 버리지 않은 채 계속 구입을 하다보니, 책이 넘쳐 바닥에 쌓아두기도 하면서 서재가 아주 지저분해졌다.
서재의 한쪽 면은 두꺼운 검정색 표지로 제본이 잘 된 법서들이 시리즈로 진열되어 있다.
교양서적들은 울긋불긋해서 품위가 없는 반면, 법서 시리즈물들은 특유의 귀족적이고 위엄있는 검정색 제본으로 인해 서재 실내장식의 가장 중요한 파트를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위 법서들은 장식적 의미만 있을 뿐, 이제는 더 이상 읽지 않는다.
법서를 버리는 일은 해서는 절대 안되는 신성모독으로 여겼으나, 오래동안 간직한 원칙을 깨고 틈 날때마다 법서를 쓰레기통에 버린다.
오늘도 일본 민사집행법 전권을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엔 품위 없고 유치찬란한 표지색의 교양서적들로 채웠다.
내 서재에서는 더 이상 귀족적 위엄이나 전통적 근엄함은 찾아볼 수 없다.
책과 함께 평생을 지내온 지금, 나는 더 이상 책으로 서재를 장식하거나 책을 정갈하게 보는 것에 관심이 없다.
줄을 긋고, 생각을 메모하며 책을 못살게 굴고 싶다.
그렇게 못살게 굴어도 나는 그 책에 대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지 모를 수준이기 때문이다.